이병헌
이병헌은 ‘연기의 달인’을 지나 이미 ‘연기의 신’이 되었다. 그의 연기를 평하며 ‘안구(眼球)를 갈아 끼우는 듯한’ 디테일한 감정표현까지 보여준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이다. SF영화도 아니면서! 정말 그런지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지난 9일 개봉되었다. 엄태화 감독의 신작 <콘크리트 유포피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대지진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무너지고 사라진다. 오직 황궁아파트만이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 이제 살아남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황궁아파트 ‘902호 입주민 영탁’은 재난 속의 리더로 우뚝 선다. 영탁을 믿을 만한가? 적어도 이병헌의 연기는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기자시사회 다음날 만난 이병헌에게서 그의 연기론을 들어보았다.
Q. 영화를 본 소감은?
▶이병헌: “영화를 만들고 나서 정말 긴 시간을 기다렸다. 엄태화 감독은 정말이지 이 영화 후반작업에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부은 것 같다. 처음 봤던 영화는 마치 딴 영화를 본 것 같았다.”
Q. 자기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병헌: “극단적인 감정을 연기해서 관객들에게 처음 보여줄 때는 조금 불안하다. 영화 속 내 연기에 동화되어, 그 정서를 이해하면 행복하지만 그런 걸 보여주기 전까지는 불안하다. 내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까? 내 정서에 들어올까? 불안감이 있다. 다행히 연기가 괜찮았다는 말을 들어 배우로서 기분이 좋았다.”
영화 '콘크리트 유포피아'
Q. [콘크리트 유토피아]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
▶이병헌: “처음엔 ‘무슨 영환데?’ 했었다. 세상이 지진으로 다 무너지는데 우리 아파트만 안 무너진다고? ‘와~ 재밌겠다’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시나리오는 재밌었다. 설정 자체가 만화적이었다. 사실 난 만화적인 것 안 좋아한다.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인간군상이 나타난다. 그런 갈등이 현실적으로 그려졌다.”
Q. 다양한 캐릭터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이병헌: “금애? 어디서 저런 아줌마를 구했는가 싶었다. 김선영 배우가 워낙 연기를 맛깔나게 잘한다. 저도 현장에서 모니터 보면서 낄낄대고 봤다.”
Q. 영탁 캐릭터는 감독과 상의하면서 조금 변했다는데.
▶이병헌: “난 대본에 있는 대로 연기한 것 같다. 대본에 있는 캐릭터를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배우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모습을 살리기 위해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눈다. 엄태화 감독은 말이 많으신 분이 아니다. 디렉팅도 많이 하지 않는다. 먼저 대화를 이끌지 않으면 특별한 디렉션 없이 연기를 해야 한다. 이런저런 말을 꺼내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는 스타일이다. 감독 중에는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힘들어하는 감독도 있다. 그런데 엄태화 감독님은 좋아하시는 것 같다. 황궁아파트 사람만을 위한 주민장부에서 자기 이름 쓸 때 자세히 보면 ‘미음’을 먼저 쓴다. (이건 스포일러네.) 어쨌든 그 장면 제가 낸 아이디어이다. 감독님이 너무 좋아하며 클로즈업으로 잡아주셨다.”
이병헌
Q. 눈치 빠른 관객들은 알 수도 있겠다.
▶이병헌: “그럴 수도. 그런데 블라인드 시사회 때 마스크 쓰고 같이 봤었다. 영화 본 뒤 관객들 설문조사한 것 보니, 아무도 그걸 모르더라.”
Q. 시사회 때 관객반응 보면, 개봉 뒤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가.
▶이병헌: “시사회에서 내가 느낀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오래 전에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기자시사회 때 숨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각한데 사람들이 낄낄 대고 웃는 것이다. 그 영화는 뒤로 갈수록 심각해지는 영화였다. 저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영화는 크게 흥행이 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Q. 이병헌 배우는 연기의 달인을 지나 신이다. 본인 연기에서 극복하고 싶은 게 있는지.
▶이병헌: “배우로서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정인 감정을 잘 이해한다고 믿고 있다. 아마 배우라면 그럴 것이다. 어떤 캐릭터를 만나게 되면 그를 이해하고, 그가 처한 상황을 다른 사람보다 더 상상하고 더 잘 이입하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는 이해도가 빠르다고 자신한다. 그렇지만 극단적인 감정을 느낄 때는 다르다. 그 감정은 주관적인 판단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그 정서를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을까. 과잉으로 판단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너무 자제해서 모자란 감정을 보여줬을 수도 있다. 나름대로의 기준은 있지만 불안감은 늘 함께 하는 것 같다. 사람들한테 내가 의도한 것처럼, 상상한 것이 고스란히 전해질지 불안한 것이다.”
Q. ‘아파트’ 노래를 부르면서 영탁의 감정이 급변한다.
▶이병헌: “처음부터 콘티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 이 장면이 잘 만들어지면 정말 중요한 키 포인트 장면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중간에 프래쉬백 나오고, 극단적으로 클로즈업 했다가 빠져나가는 장면을 그릴 수 있었다. 감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아파트’ 부를 때 막춤은 후배한테 배운 아재 춤이다. 노래에 어울리는 율동을 생각한 것이다. 윤수일 선배님의 옛날 영상도 찾아봤는데 당시엔 율동이 없더라. 뭔가 신나게 노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Q.이번 작품에서 이병헌 배우의 얼굴을 극단으로 잡을 때 그 일그러진 모습, 미묘하게 변화는 표정연기가 압권이었다.
▶이병헌: “얼굴 표정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지는 않는다. 모니터링 하면서 자신의 얼굴표정 바뀐 것을 알게 된다. 연기 연습할 때 거울 보고 얼굴 표정 연습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면이 있어야 껍데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모니터를 보고 나도 못 봤던 얼굴이 나와 놀랐다.”
영화 '콘크리트 유포피아'
Q. 후반부에 아파트 나가서 식량 구하는 장면 다음에, 헛구역질을 한다. 그런 연기에 대해 설명을 좀 하자면.
▶이병헌: “헛구역질하는 장면은 초반 아파트 화재장면에서 소화전 두들기며 이상한 소리 끙끙 내는 것과 함께 제일 많이 고민했던 장면이다.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물이 나오게 간절히 바라는 행동을 해야 했다. 감독님이 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떤 소리죠?’ 감독님은 주문 같은, 기괴한 소리, 뭐가 되었던 간절함이 느껴지는 소리를 원했다. 관객들이 ‘마법사야!’라는 기분이 들도록, 간절하게 느껴지도록 별의별 소리를 내며 찍은 것 같다. 속으로 계속, 많이 의심하며, 불안해하며 찍은 장면이다. 관객들이 내 행동을, 내 소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독님의 의도를 최대한 넣어보려고 한 장면이었다.”
“이 영화를 찍다가 두 번 정도 정신의 끈을 놓은 순간이 있었다. 바둑판 장면이랑, 혜원(박지후)을 던져버리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영탁이라는 인물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처럼 포효한다. 억울함과 분노로 정신 줄을 놓친 것이다. 도망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행동을 보여준다. 평소의 영탁이라면 그런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원래의 자기 모습과 다른, 그런 괴리감이 헛구역질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독님이 헛구역질을 하라고 했는데 너무 과한 감정의 연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감정의 끊을 놓았다면 그런 모습이 나올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Q. 이병헌 배우도 자신의 연기에 불안해하고, 의문을 품는다. 연기에 대한 확신은 어떻게 드는지.
▶이병헌: “내 연기에 대한 믿음이 언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불안감만 가지고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맞을 거야’라고, 반복적으로 ‘괜찮을 거야’라고 믿어야 다음 연기를 할 수 있다. 계속 불안해하는 감정으로는 온전히 그 캐릭터를 할 수 없다. 그렇게 연기를 하다보면, 내가 해온 작품의 결과를 보면 확신이 든다. 불안 속에서 만들고, 관객들 반응 보면서, 내감정이 맞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병헌
Q. 영탁이란 인물에 어떻게 스며들었나.
▶이병헌: "영화를 찍는 4-5개월 동안 계속 그 인물을 이해하려고 했다. 어떤 장면이라고 꼭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귀신에라도 씌어 연기한 것 같다. 영탁에 젖어들었다고 생각하고, 그 알고리즘은 몇 달 동안 갖고 지냈다. 나 스스로 그 인물이 되고 싶어서 발버둥친 것 같다.”
Q. 첫 등장 신부터 분위기를 압도하는 아우라가 있다.
▶이병헌: “영화는 종합예술이니까. 분장도 필요하고, 사전에 여러 번 회의를 거친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고. ‘이게 가장 적절하다’, ‘영탁답다’고 결론이 나면 그렇게 분장도 하고, 의상도 갖춘다. 영탁이 이렇게 입으니 걸음걸이도 이렇게 된다. 어떤 신에서는 그로테스크하게 나와야하니 ‘콘트라스트를 더 넣읍시다. 한다. 그래서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Q. 영탁은 어떤 인물인가.
▶이병헌: “영탁이 절대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탁이라는 인물은 경악스러운 짓을 저지르지만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몇 명은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면서 정신 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영탁은 돈도 다 냈고, 내 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기를 당한 것이니. 몸싸움을 하다, 정말 욱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그런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둑알까지.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가장 큰 상실감, 절망감을 느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시체 옆에서 멍하게, 누워있는 할머니 옆에서 한동안 있으면서 아무런 삶의 의미도 못 느꼈을 것이다. 그는 아파트, 집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있다. 그래서 불이나자 바로 나서서 불을 끄려고 한다. 그 일 때문에 주민대표가 되고, 사람들이 ‘리셋’한다는 말에 심경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완정을 차게 되니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처음에는 투표로, 민주주저 리더로서 책임감을 느끼지만 나중엔 권력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Q. 나중에 박서준이 스스로 무릎을 꿇을 만큼 권력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병헌: “그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리더가 되어본 적이 없는 루저라고 생각한다. 처음 주민대표 되었을 때의 어리숙함과 주변머리 없는 느낌. 그 사람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까. 사람도 죽고, 자기 가족도 재난을 겪었으니. 얼이 빠진, 반 패닉의 상태였다. 권력의 맛도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신분의 변화에 따른 둔탁함, 거침을 표현하려고 했다”
영화 '콘크리트 유포피아'
Q. 다음 작품은?
▶이병헌: “‘콘크리트 유토피아 투?” (하하하)
한편,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 않은 <오징어게임2>와 관련하여 이병헌은 다른 인터뷰 타임에 "외신들이 내용에 대해 추측하는 걸 나도 봤는데 맞는 건 하나도 없다"고 살짝 언급했다.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 2부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엄태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난 9일 개봉되었다. 이병헌과 함께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등이 출연한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공동제작: BH엔터테인먼트)
[사진=BH엔터테인먼트/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