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 판타지 『영혼의 물고기』로 2000년 제1회 황금드래곤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던 김유정의 소설집 『용의 만화경』이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2015년 전자책으로 출간된 『고래뼈 요람』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작으로, 마법이 존재하는 중세에서 우주 개척 시대에 이르기까지 판타지와 SF를 넘나드는 작가의 폭넓은 세계를 보여 주는 10편의 중단편이 담겨 있다.
코로나 발생 이전부터 초기 사이에 쓰인 수록작들은 시대상을 반영하듯 대체로 어떤 시기의 마지막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인간 속에 섞여 살며 숙주의 생기를 흡수하던 흡혈귀가 팬데믹 사태로 생존의 위기를 맞고(「장미흔」), 파국적인 소식을 전할 사명을 띤 순례자가 쇠락하는 마을을 방문하며(「나무왕관」), 현재의 고통을 벗어나려 택한 냉동수면에서 깨어나 보니 모두가 사라진 절대 고독의 세상이 펼쳐지기도 한다(「M과 숨」). 그러나 이러한 종말들은 항상 절망적으로 그려지지만은 않으며, 주류에서 벗어난 다채로운 인물들은 과거를 품에 간직한 채 새로운 갈망과 미래를 꿈꾼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힘으로 주인공을 경이의 세계로 안내하는 표제작의 초월자처럼, 『용의 만화경』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을 만화경의 빛깔 같은 찬란한 꿈으로 안내한다.
표제작 「용의 만화경」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대학원생의 앞에 백여 년 전 초대 총장의 호의로 학적에 등록했던 용이 새로운 연구생으로 등장하며 시작된다. 인간의 상식과 법칙을 가볍게 무시하는 이 용은 사실 단순히 신화적 생물이 아니라, 세상에 축적된 정보의 총합인 ‘에너지체’이다. 초월적인 시간 감각을 지닌 덕에 무수한 변화와 멸종을 목격해 온 이 존재를 통해 주인공의 세계는 혼란스럽지만 경이적인 방식으로 끝없이 확장한다.
김유정의 소설들은 지극히 범상해 보이는 일상을 놀라울 만치 다른 풍경으로 그려 낸다. 로봇청소기와 바뀐 몸으로 사물인터넷의 네트워크를 감각하기도 하고(「안녕, 엘리자베스」), 가상공간의 트롤 행위로 인해 어지러운 난수의 세계를 엿보기도 하며(「수직」), 인생의 끝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기도 한다(「청백색 점」). 낯설고 이질적이어야 할 그러한 풍경들은 단정한 문장 속에서 어쩐지 한없이 그리움을 자극하는 공간이 된다. 제각기 다른 이유로 고단해 보이는 『용의 만화경』 속 인물들은 우연, 미신, 혹은 운명이나 사명과 같은 힘에 움직이며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먹먹하게 그 상상의 공간을 뚜벅뚜벅 나아간다. 그 모습들은 마치 세상일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 보여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듯이 잔잔한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수록작품] 장미흔/ 나무왕관/ /우주 시대는 미신을 사랑한다/ 청백색 점/ 만세, 엘리자베스/ 용의 만화경/ M과 숨/ 소모품 마법사/ 나와 밍들의 세계/수직/
▶용의 만화경 글:김유정 출판사: 황금가지 발행일: 2023년 6월 9일 4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