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막을 내린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진출한 한국영화는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버닝> 한 편 뿐이었다. 이 작품에는 충무로 톱스타 유아인과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스티븐 연과 함께 신인 전종서가 출연했다. 전종서는 단편영화에조차 출연한 적인 없는 진짜 초짜 여배우이다. 세계적인 거장 이창동 감독은 전종서에게서 어떤 매력을,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에 선뜻 캐스팅했을까. 전종서 배우를 만나 그 미스터리함을 풀어보고 싶었다. 칸에서 돌아온 뒤, 영화가 개봉된 뒤 지난 23일 오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이야기의 기반으로 삼아 작금의 한국 청춘의 불안함과 계급적 격차를 은연중에 표현한다. 흙수저 알바인생을 사는 유아인과 유한계급의 한량 같은 스티브 연, 그리고 그 두 남자를 아는 미스터리한 여자, 전종서가 영화를 이끈다.
데뷔작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은 전종서에게 특별한 추억이 없었냐고 먼저 물어보았다. 잠깐 생각하더니 뜻밖의 대답을 한다. “호텔에서 이를 닦는데 치약이 다르더라. 결국 혓바늘이 돋았다. 쉐이빙 크림을 쓴 모양이다. 프론트에 전화했는데 프랑스 사람은 우리같이 급하지 않더라. 치약 가져다주는데 15분이나 걸리더라. 입술 붓고 혓바늘 돋고 그랬다. 숙소에 혼자 있으려니 쓸쓸했다.”란다.
전종서는 몇 차례 오디션 과정을 거친 뒤 <버닝>에 출연한다. “감독님이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다. 궁금해 하시는 부분을 거리낌 없이 다 말씀 드렸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 같다.”며 “이렇게 관심가지고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은 없다. 감독으로서 배우를 탐문한다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이해하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전종서는 지금의 소속사를 찾는데 2년이 걸렸단다. “방향을 잡아줄 사람, 저에 대해 수용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 그런 회사를 찾았다. 회사에서도 컬러가 맞아야했을 것이다. 결국 이 회사를 만나기 위해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필요한 사람을 만났고, 선택된 프로덕션이 ‘버닝’이었다.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전종서는 소속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버닝’ 오디션을 봤었던 거란다. 그리고 원작(하루키 소설)을 읽을 틈도 없이 영화촬영에 들어간다.
소속사를 찾을 때 ‘영화 먼저, 드라마 먼저’ 같은 기대가 있었는지.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보는 것에 미쳐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영화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어떤 영화 좋아하는지. “‘몽 루아’(Mon roi)라는 프랑스 영화. ‘나의 왕’이란 뜻이다. 여자가 주도적으로 끝까지 끌고 가는 작품이다. 여자주인공의 감정선이 밑바닥까지 간다. 우디 앨런 영화도 좋아한다. 내면에 있는 감정들이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로 다가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농도 짙은 영화를 좋아한다. 참, 마블도 좋아하고.”
전종서는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녔다. 그런데 단편영화에 한 편도 출연하지 않았다니 신기했다. “학교엔 잘 안 나갔다. 학점 채우겠다고, 졸업장 받겠다고 4년을 투자하고 얻어지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학교에서 친해진 사람은 있다. 연기를 배우겠다고 갔는데 우물 안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박차고 나왔다.” 평범하지 않은 세계관의 소유자임을 짐작케 하는 대답이었다.
<버닝> 속 해미와 자신은 닮았나? “그냥 ‘해미’가 된 것 같다. 접신을 한 것은 아니다. 저의 어떤 모습이 투영이 되었고, 그게 캐릭터가 되었을 것이다. 저의 일부의 모습이 된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모습도 있지만.”
전종서는 데뷔작인 <버닝>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연기생활을 계속한다는 전제 아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첫 작품에서 모범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배운 것 같다. 감독님, 제작자, 배우, 스태프들이 모두 훌륭했다. 감독님이 처음 말씀 하셨던 것이 이 첫 작품이 앞으로 나의 작품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그랬는데 정말 그럴 것 같다.”
영화 ‘버닝’에서 해미는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다. “해미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해미가 죽었든 살았든, 그 우물이 있었든 없었든, 고양이가 실재하든 않든, 모든 사람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그런 사실의 유무가 아닌 것 같다.”
촬영하며 가장 어려웠던 장면은? “첫 촬영이었다. 영화의 첫 장면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찍은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면 다시 찍어야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테이크를 여러 번 한 것은 아니다. 제가 처음이라 너무 얼어있었다. 첫날 신고식을 호되게 했다. 그 다음부턴 잘 진행됐다.”
현장 분위기는? “다 같이 잘 어울렸다. 느끼고, 나누고, 공감하고. 부딪치고, 대화하고 그랬다. 유아인씨가 영화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하는데 오히려 많이 챙겨주시려고 했다.”
영화 첫 장면에서 자신 때문에 테이크를 많이 가져갔다는 전종서는 이창동 감독의 완벽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장면이 테이크를 여러 번 했었다. 배우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빛이 어때서, 뭐가 어때서, 그래서 다시 찍자’ 그런 식이었다. 감독님은 최대치의 것을 담으려고 하셨다.”
파주 시골농가에서, 노을 녘에 춤추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게 뭔지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담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춤추는 장면에서 조명은 따로 없었다. 노을이 지는 아주 짧은 찰라를 잡아내야했다. 리허설을 며칠 하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감독님은 연습한 것 말고,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다. 마임도 준비를 하고 슛 들어갔는데, 연습대로 한 게 없었다.”
특별히 관심 가지는 것이 있는지? “옷에 관심이 많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게 뭔가를 뜻할 수도 있다. 옷도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 패션 테러리스트는 아니에요”란다. 순간 기자들은 자신들이 뭘 잘못 입고 왔나 싶어 옷을 살펴본다.
전종서는 시사회 때 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당하게 보여 드리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저는 배우이기 전에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대할 때 분명한 가치관을 가져야하고, 어떤 삶을 살든 당당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니깐, 그리고 그게 권리니깐. 제가 운 좋게 배우가 되었으니 연기를 통해 이런 가치관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면서 “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배우가 있을 것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화가 있듯이. 나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싶다. 그런 부분에서 당당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종서는 가슴 속 응어리는 어떻게 풀까. ‘그레이트 헌터’처럼 흐느적거리며 춤이라도 출까. “멀리서 관조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최대한 떨어져서. 아직은 그 거리가 가깝다. 멀리 떨어져서 관조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요즘 근황을 묻자 “스티븐연이 선물해 준 <불안이 주는 지혜>(앨런 와츠 지음)를 읽고 있다. 영화도 본다. 요즘 퀴어 영화만 보고 있는 것 같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봤고, ‘빌로우 허’ 보다가 잠들었다. 음악은 항상 듣는다.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라더니 “음악, 책, 영화, 예술이 없으면 너무 재미없을 것 같다”란다.
‘모그’의 음악, ‘하루키’의 책, ‘이창동’의 영화, 신인여배우가 펼치는 ‘예술’ <버닝>은 지난 주 개봉하여 극장상영 중이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CJ아트하우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