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
이창동 감독은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었다. 그 전에는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기도 했고,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가이기도 하다. 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그것도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영화로 만들었다기에 궁금해졌다. 하루키의 오리무중 같은 작품을 장편으로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확실히 원작소설은 이야기 구조가 너무 짧고, 맥락이 없는 듯하다. 할리우드에서 필립 K. 딕의 단편 하나를 블록버스터로 옮길 때처럼 ‘인상적인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만 가져와야 2시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는 2시간 27분이란다)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는 ‘한’ 남자가 ‘옛’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가 ‘새’ 남자를 소개해주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옛 여자의 행적은 흐릿하다. 새 남자는 뜬금없이 자신은 헛간을 불태우는 것이 취미라고 말한다. 남자는, 그때부터 자신의 주위에 불탄 헛간이 없는지 둘려보는 강박 아닌 강박에 빠진다. 그러다가 문득, 옛 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 남자도 그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단다.
이 이야기를 이창동 감독은 어떻게 풀어나갈까. 이창동 감독은 한국청춘의 불안함을 구겨 넣으면서 돌파구를 찾는다. 기실, 원작의 남자는 유부남이고 직장인이다. ‘버닝’ 속 남자(유아인)는 변변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남자이다. 영화는 그 남자의 상황을 좀 더 채워나간다.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존재와 어릴 적 도망간 엄마까지. 그런데, 옛 여자는 여전히 의문투성이이다. 그의 기억이 잘못되었는지, 그녀의 거짓말이 너무 능숙해서인지 관객들조차 판단이 흐릿해진다.
영화 <버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루키의 소설뿐만 아니라,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Barn Burning’)도 읽어둬야 할 것이다. 포크너의 단편은 훨씬 ‘분노’에 다가간다. 남북전쟁이 끝난 한참 뒤, 그 전쟁 때보다 더 밑바닥으로 떨어진 남군 출신의 아버지를 둔 어린 아들의 시각으로 당시의 어두운 계급사회를 그린다. 자신들의 하찮은, 바닥의 삶이 모두 거들먹대는 저들 때문이라는 듯이, 그리고 그 복수의 방식은 ‘헛간을 불태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버닝’에서는 하는 일 없이 포르쉐를 몰고, 자신(?)의 여자를 단순한 노리개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또 다른 청춘에게 위축되고, 좌절하더니, 끝내 제어할 수 없는 분노를 폭발시키는 유아인의 연기는 발군이다. 포르쉐 앞에서 주눅 들린 청춘의 모습이 측은하다. 게다가 흐느적거리는 몸짓은 성(性)불구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남성적 의기소침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유아인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벤 역의 스티븐 연은 여러모로 효율적인 역할을 해낸다. 벤의 입에서 이 이야기는 ‘메타포’라고 강조한다. 벤(과 벤의 의심스러운 친구들)은 이 영화가 하루키에서 멀리, ‘위대한 개츠비’에 좀 더 가까워진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좀 된 표현이지만) ‘압구정동 오렌지족’의 현현(顯現)이다.
전종서는 유아인의 청춘을 돋보이게 하는, 스티브 연의 1회성 노리개이다. ‘그레이트 헝거’라는 근사한 아프리카 이야기도, 다음 여자의 중국인 에피소드도 결국 이들 의심스러운 친구들에게는 한낱 동정심 혹은, 파티의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하품하는 벤이라니!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하품을 캐치하고, 그런 벤을 뒤쫓고, 그런 미스터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아인의 무게이다. 영화는 보잘 것 없는 능력(재산, 성적 능력, 그리고, 현실감)을 가진 전형적 (한국)남자와 엇비슷한 처지의 여자의 퉁명스런 만남이 빚어내는 서글픈 청춘이야기이다. 애당초 이들은 벤 같은 인물과 어울릴 여지가 없었다. 그들이 탈출한 곳은 옥탑방 아니며,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전종서가 어디로 갔는지는 맥거핀에 속할 것이다. 벤은 그녀의 행방에 대해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특유의 친절함으로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 여자는 처음부터 좀 가벼웠잖아요."라고. 2018년 5월 17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