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 않아요. 하루하루 무사히 지내기만을 원한다고요. 이념은 사치예요. 당신 생각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이 되어 토담집으로 돌아간 농민들이 자리에 앉아서 신과 민주주의에 관해 명상할 것 같아요?” ― 본문에서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교한 문장과 완벽한 구성, 시대정신과 사회 문제, 인간 조건의 핵심을 명철히 통찰해 낸 작가 그레이엄 그림의 대표작이자 문제작 『조용한 미국인』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을 몸소 경험한 안정효의 생생한 번역과, ‘《타임》 선정 100대 영어 소설’에 이름을 올린 제이디 스미스의 서문까지 더해진 판본이라 더욱 뜻깊다.
그레이엄 그린은 흔히 ‘가톨릭 작가’라고 불리지만 동시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복합적이고 이색적이며 변화무쌍한 면모를 보여 준 희귀한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린은 문학성을 중시하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지명되는 동시에 스스로 ‘오락물’이라 칭한 대중 소설의 영역에서도 굉장한 성공을 거둔 유일무이한 작가일 뿐 아니라, 한평생 치명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돌연히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2차 세계 대전 동안 전 세계의 벽지와 험지를 방랑하면서 첩보원으로 활약하고, 사회 참여와 개인적 번뇌 사이에서 끊임없이 실존을 탐구하는 등 대단히 복잡다기한 내력을 지닌 작가다. 따라서 그의 작품 역시 한 가지 주제나 장르, 시각과 태도로 뭉뚱그릴 수 없는 경이로운 다양성을 품고 있다.
이토록 거대하고 장엄한 그린의 스펙트럼은 때때로 조화하거나 불화하면서 시대나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늘 독자로 하여금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모순과 기만을 직시하도록 부추긴다.
그린이 앞서 여러 장르 문학에서 선보인 기교와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텔링, 『권력과 영광』 그리고 훗날 발표하는 『말기 환자』 등의 굵직한 작품들에서 섬뜩할 정도로 신랄하게 그려 낸 기만과 모순으로 점철된 인간의 민낯을 완벽히 종합해 낸 『조용한 미국인』은 지극히 ‘그린다운 방식’으로 격동하는 현대사와 공명하며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두 차례의 파괴적인 전쟁 끝에 도래한 탈식민주의의 물결과, 구세계 유럽의 해체, 이념으로 분열된 냉전 시대의 대두, 가톨릭 신앙과 실존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모든 사건과 현실에 연루되어 있고, 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그레이엄 그린은 『조용한 미국인』 속의 세 인물, 즉 냉소적이고 기만적인 ‘영국인’ 파울러, 신념과 이상의 노예가 되어 실재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미국인’ 파일, 구세계와 신세계 그리고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가는 ‘베트남인’ 후엉을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불길한 암운을 예언적으로 간파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동안 프랑스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던 베트남은 해방과 독립의 열기로 달아오른다. 각기 이념은 다르지만 자주(自主)를 부르짖는 베트남 사람들, 지금껏 제국주의를 주도해 온 프랑스와 영국, 이제 새로운 패권 국가로 대두한 미국, 그에 맞선 공산주의 진영의 소련과 중국 등 복마전을 이룬 온갖 세력들은 푸른 대지를 핏빛으로 물들인 인도차이나 전쟁의 기나긴 포화 속에서 저마다 자신만의 이권과 목표를 쟁취하고자 격돌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베트남에서 영국 《더 타임스》의 토머스 파울러 기자는 날마다 폭탄이 날아들고 논밭에서 살육이 자행되는 베트남으로 특파된다. 그곳에서 어느 날 막 학생티를 벗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 올든 파일, 그러니까 ‘조용한 미국인’ 을 만나게 된다.
프랑스 세력이 패퇴하고, 베트밍과 지방 토호와 사이비 종교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장 단체까지 창궐하면서 급박하게 변화하는 베트남 상황을 취재하던 파울러는, ‘조용한 미국인’ 파일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고, 순진함이 지닌 잔인한 광기를 비로소 깨닫는다.
▶조용한 미국인 (THE QUIET AMERICAN) ▶그레이엄 그린 지은, 안정효 옮김 ▶민음사 448쪽 | 2023년 04월 21일 출간 | 값 1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