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가요무대> 현지 취재기
그리웠던 고국의 목소리, 울고 웃었던 뜨거운 현장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이 낯선 독일로 향한 지 50년을 맞아 KBS가 마련한 <가요무대>를 현지에서 취재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8000㎞를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준 것은 입국장에서 쏟아진 꽃다발과 환호 세례였다. 흰 머리칼, 주름진 얼굴의 팬들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는, 아이돌 스타들을 향한 젊은이들의 팬심과는 사뭇 다른 그윽하고 따뜻한 무엇인가가 담겨있었다.
공연장인 루르 콩그레스 보쿰 앞은 공연 5~6시간 전부터 ‘바글바글’했다.베를린에서 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려온 옛 광부들, 카풀을 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온 간호사 동료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선후배들의 손을 부여잡고 즉석에서 ‘아이쿠’와 ‘악 조(Ach So)’를 반반씩 써가면서 한국 향우회가펼쳐졌다. 간호사·광부와 백년가약을 맺은 푸른 눈의 반려자들, 그 자녀들도 곳곳에 보였다. ‘웬 아이가 보았네~’로 우리 귀에도 익숙한 독일 민요 ‘들장미’를 색동한복을 곱게 차린 재독 어머니 합창단이 ‘한국식 화음’으로 선사해 눈길을 끌었다.
김연자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시작으로 ‘대머리 총각’(김상희), ‘이별’(권성희), ‘갈대의 순정’(송대관) 등 한국을 떠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들에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한 청중들은 때로는 훌쩍이고 때로는 손뼉치고 때로는 발을 구르며 무대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자신들임을 힘껏 과시했다. ‘고향초’(주현미), ‘꿈에 본 내 고향’(김국환), ‘비 내리는 고모령’(김용임), ‘사모곡’(태진아), ‘머나먼 고향’(현철),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현숙) 등가족과 고향을 그리는 노래들이 흘러나올 땐 안경을 닦고 눈가를 훔쳤고, ‘하얀민들레’(진미령), ‘찰랑찰랑’(이자연), ‘사랑의 트위스트’(설운도) 같은 밝고 흥겨운 노래들이 이어지자 누구랄 것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떼창’ 대열에 동참했다. 소리꾼 장사익과 명창 김영임의 우리가락이 이어질 때는 한국 핏줄 아니랄까봐 ‘얼쑤’, ‘지화자’같은 추임새도 팡팡 터졌다.
이번 공연이 더욱 뜻깊었던 것은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빛’만큼이나 ‘그림자’에도 주목했기 때문이다. 광부 생활 다섯 달 만에 탄광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던 고(故) 김중원씨가 어머니·부인·두 딸에게 보냈던 편지지의 또박 또박 정갈한 글씨체, 39년 만에 파독 간호사 출신의 동생을 찾으러 나온김영자 님이 구사하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는 가수들의 열창과 객석의 뜨거운 반응 못지않게 인상 깊은 장면이 됐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동포들은 한참동안 극장을 뜨지 못했고, 더러는 무대 뒤편으로 가서 가수들과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사진들은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삶을 일구는데 소중한 추억이자 힘이 돼줄 것이다.
정지섭 (조선일보 대중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