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열린 영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보고나면 한 여배우가 ‘강렬하게’ 뇌리에 남을 것이다. ‘숙희’ 역으로 그 해 청룡영화상 등 웬만한 영화상의 신인상을 휩쓴 김태리이다. 김태리는 <아가씨>에 이어 장준환 감독의 <1987>에서 1987년의 대학생 연희 역을 맡았다. 김태리는 1990년 생이다. 그리고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로 돌아왔다. 김태리를 만나 그녀의 영화 같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지난 달 23일 삼청동 한 카페에서 이뤄진 인터뷰이다.
“‘리틀 포레스트’가 잘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어 기분이 좋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설렜는데 더 좋게 나와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는 일본 동명의 만화를 옮긴 작품이다. 이미 일본에서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임순례 감독은 한국적 상황과 한국적 미각(味覺)을 버무려 영화를 더 풍성하고 먹음직스럽게 완성했다.
“감독님이랑 카페에서 만나 주스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제 개인적인 모습을 궁금해 하시다가 꽤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탈탈 털리고 며칠 있다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다.”며 ‘민주투사’에서 ‘시골 귀환녀’로 전향하게 된 순간을 소개했다.
“이번 작품에서 혜원이를 연기할 때는 저와 닮은 부분부터 끄집어냈다. 폐쇄적인 모습이다. 상처입고, 스트레스 받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도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 혼자 해결하는 혜원의 그런 모습 말이다.” 김태리는 자신이 “독립적인 성격이고, 잘 하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존심도 많고, 말도 함부로 하다 친구의 화를 돋우는 그런 면이 혜원을 닮았다.”고 말한다. ‘혜원’과 ‘숙희’의 모습이 겹쳐진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은 시골에서 자란 인물이다. 요리 잘하는 엄마(문소리) 밑에서 맛있게 먹고, 단단하게 자라서는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로 갔다가,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편의점 알바생활을 하다 다시 시골로 돌아와서는 옛 친구를 만나 ‘자신의 삶’을 재설계하는 인물이다.
“시나리오에 있는 부분을 많이 생각해 보았다. 수능이 끝난 후, 엄마가 자신 곁을 떠난 뒤, 고등학생이었던 혜원이 모자를 눌러쓰고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첫발을 내딛는 사회에서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말한다.
김태리는 ‘88세대’와 ‘이른바’ 편의점청춘의 모습을 통해 작금의 청춘이 겪는 아픔을 보여준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노량진 학원가 청춘의 모습이 있지 않나. 그것이 이 영화의 장치라면 장치”라고 나름 영화를 분석한다.
“혜원 개인에게 집중하다 보면 공감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특수한 상황이니까. 내려갈 시골집이 있으니. 그래서 서울의 모습에서 보편적인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면서 연기했다.”
영화에서 혜원은 미식가이며, 요리가인 엄마(문소리)의 영향으로 다양한 제철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음식 만드는 장면은... 직접 해본 건 배추전이다. 겁나 쉬워요.”라더니 “김치볶음밥을 잘해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최근에 독립을 했다. 그래서 요즘 너무 배고픈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덧붙인다. (영화 속 장면이 떠오른다.)
돌아온 시골집, 반가운 친구(류준열, 진기주), 맛있는 음식. 혜원의 삶은 어땠을까. 위로를 받았을까. “연기를 하면서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또래 배우들과 합을 맞춘 게 즐겁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우리 세 명은 잘 어울렸다. 평상에 앉아 오늘 날씨가 어쩌니, 서울 가서 뭐 할 것이니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힐링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럼, 영화가 끝난 뒤 지금 김태리에게 가장 큰 힐링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찍으면서 배운 요리? “집에 고양이가 두 마리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같이 인터뷰한 기자들 중에 애묘가, 애견가가 있어 한동안 고양이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다시, 영화. 류준열과 방울토마토 장면을 소개했다. “마지막 촬영이었다. 콘티에는 ‘던지고 논다’라고만 되어 있었다. 재밌게 촬영한 기억이 있다. 나는 몇 번 잘 받아먹었고, 준이 오빠(류준열)는 잘 받지를 못했다. 거듭 실패하다가 받아먹는 장면이 화면에 나왔다.”고 말한다. (김태리는 인터뷰 초반에 잘하는 것은 인정받고 싶어한다고 밝혔었다!)
<아가씨>이후 재평가된 단편 <문영>의 감독도 여성감독이었다. “꼭 여성감독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이 작업한 감독님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서이다. 성별을 떠나 맑은 분들과 작업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더하다. 임순례 감독은 ‘자연과 함께, 더불어, 소중히 여기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벌레나 애벌레 나오면 절대 죽이지 않는다. 송충이 나오는 장면. 3층 높이에서 집어던지는 장면이었는데 밑에 모포가 깔려있었다.”고 자연친화적이었던 촬영현장을 소개했다.
김태리는 충무로의 대감독들과의 작업한 소감을 밝혔다. 박찬욱 감독(아가씨), 장준환 감독(1987)의 작업특성을 이야기하고는 이번 임순례 감독과의 작업이 “행운이었고, 기적이었다.”고 말한다. “좋은 분 만나 작업했다. 신인배우에게는 중요했다. 저를 이끌어줄 수 있는 그런 분들이 중요하다. ‘아가씨’ 때와 달랐던 것은 함께 같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들어진 장면, 애드립으로 채워진 부분도 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재밌더라. 생동감 있고, 관객 분들도 잘 받아들이더라.”고 덧붙였다.
김태리는 이번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장면으로 토마토 먹는 장면과 수박 먹는 장면을 꼽았다. “엄마와 나란히 토마토 먹는 장면은 혜원에게 엄마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말해 주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좋은 장면, 좋은 대사였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으면 스스로에게 반성을 많이 했다. 수박 먹는 장면에서 나온다. 친구가 힘들어하는데 상처주고 그러잖은가. 알지도 못 하면서 함부로 말하고.”
김태리와 ‘엄마’ 문소리는, ‘친구’ 김태리-류준열-진기주는 어떻게 될까. 괜한 질문을 던져본다. “엄마는 장난스럽고 매력적인 분이니 아마도 어른스러운 삶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그런 부분은 관객 분들이 생각할 몫이다. 잘 살고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김태리의 취미는 게임, ‘플스’란다. “게임 좋아한다. 승부욕도 있고요. 몸 움직이는 것도 좋아한다. 운동 다시 해야 하는데 요즘 못하고 있다.”면서 “산을 좋아해서 산에 가는 것 좋아하지만 자주는 못 간다. 산에 못가면 산이 보이는 탁 트인 곳에서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리틀 포레스트>의 촬영은 1월에 크랭크인 들어가서 10월까지 열 달 동안 촬영했단다. 열 달 내내 촬영한 것은 아니란다. “한 계절 당 3주 정도 촬영했다. 감독님이 무슨 꽃 폈다 내려와라, 추수해야하니까 내려와라. 그랬어요.”
<아가씨>로 대박을 치고 시나리오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아니란다. “잘 모르겠다. 인기, 그런 것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가씨>로 20대 여성 팬이 많은 것 같다는 말에 “숙희는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캐릭터다. 그런 면은 조심스런 점도 있다. 앞으로 무슨 말을 할 때, 작품을 고를 때 그런 면을 신경 쓰는 것 같다”며,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제 자신이 중심을 단단히 잡을 것이다. 여러 방향에서 노력하고 있다. 물론 진취적인 여성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없다.”
“배우로서의 야망? 딱히 없다. 야망이 없는 게 걱정이다.”고 대답한 김태리는 희망사항에 대해서는 “미스터 선샤인 흥행?”이라고 말하더니 “하고 있는 것 덜 지치고. 스트레스 덜 받으며 촬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첫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대한 소감도 밝혔다. “드라마는 처음이라서 잘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드라마는 영화와 많이 다르다. 영화는 2시간 안에 한 인물을 특징지어 임팩트 있게 그려야한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 소중하게, 조심스레 한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런 식으로 모든 장면 힘입게 들어가면 보시는 분들도 지칠 것 같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리틀 포레스트>. “유행하는 부류의 영화는 아니다. 이런 영화도 잘 되고, 쏟아 부은 만큼 거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양한 영화, 여성영화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인터뷰 말미에 “연기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김태리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계약이 되었으니, 찍을 게 남아있으니. 내가 왜 연기를 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재미있으니까, 성취감이 컸었다. 연기는 참 재밌다. 직업으로 삼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었다. 요즘 들어서는 연기가 예전만큼 재밌지 않다. 재미보다는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크다. 어쩌면 책임감을 더 많이 느끼게 된 것 같다. 팬 분들이 너무 사랑해주시는 것도 있고.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감독님 만나는 것은 배우로 너무 좋은 일이다. 너무 어려우 질문이네요. 죄송합니다”라며 답을 끝냈다.
임순례 감독의 독립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지난 주 개봉되었다. 독립영화 특성상 서두르지 않으면 영화 내릴지 모른다. 김태리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과 아직 정해지지 않은 김태리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