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리 감독
정주리 감독이 영화 <도희야> 이후 9년 만에 두 번째 영화 <다음 소희>로 돌아왔다. 2017년 발생한 비극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다음 소희’가 절대 생기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 마음을 안고 정주리 감독을 만나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시은 배우는 고등학생 ‘소희’를, 배두나 배우는 경찰 유진을 연기한다.
Q. <도희야>이후 9년 만에 두 번째 영화가 개봉된다. 소감은.
▶정주리 감독: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렇게 개봉이 되니 이제 차원이 다른 상황이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서 더 신중해지고, 더 걱정이 된다. 저는 영화 한 편을 만들었지만, 영화 밖에서 나눌 이야기가 더 많을 것 같다. 시사회 때 기자들이 어떻게 볼지 걱정이 되었다.”
Q. 유진(배두나)이 한 대사 중에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아야 한다’는 대사가 있다.
▶정주리 감독: “직접적으로 뭔가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함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 그 대사는 좀 더 감정이 들어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 장면에서 딱히 전과 후가 연결되는 대사는 아니다. 막연하게나마 유진이란 인물을 통해 더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아이가 왜 점점 고립되어 갔는지 전해주고 싶었다. 교육청을 찾아갔을 때 장학사가 ‘적당히 합시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이 못된 사람이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그런 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고, 늘 하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영화에서 접할 때 다 같이 무력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주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영화 '다음 소희'
Q.배두나 배우가 연기한 유진 형사의 역할은?
▶정주리 감독: “나름대로 그 인물에게도 상황이 있다. 당연히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빼버리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관객 분들에게 궁금증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로지 형사로서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는 유진에게도 사람으로서의 삶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정도의 입체적인 인물로 나오기를 바랐다. 극중에서 유진의 어머니 이야기가 언급되는 것은 딱 한 번이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유진은 ‘지금 바로 가봐야 해서요’라며 나가 버린다. ‘빨리 이야기를 전개시켜야 해요’라는 감독으로서의 느낌이 들었다. 부산(BIFF)에서 상영될 때 느낀 것이다.”
Q. 유진이 소희의 마지막 길을 따라가다가 저수지 앞의 슈퍼에서 맥주를 마신다. 그러다 문으로 스며드는 빛을 바라본다. 소희가 그랬던 것처럼.
▶정주리 감독: “명시적으로 그런 장면을 확실히 담아야겠다는 것은 없었다. 호기심이랄까 안쓰러웠다. 차가운 겨울이고, 세상은 온통 어둡다. 그런 모노톤의 세상에 마지막에 밝은 빛이 스며든다. 전체가 환하지 않은 빛. 그 빛이 그 날의 마지막 빛이었을 텐데. 소희의 찬 발에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이 친구한테 그 순간만이라도 위로가 될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할까.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영화적으로 일말의 따뜻함이, 일망의 희망을 느낄 만한데. 그런데 바로 비극적인 상황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오는 대비가 관객에게 특별한 감정을 줄 것이다. 2부에서 유진이 한 번 더 찾아오면서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진은 소희의 존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럼, 이 사람은 다음에 무엇을 할까? 그렇다고 유진이 저수지에 가면 안 될 것이다.”
영화 '다음 소희'
Q. 슬리퍼를 신었던 소희, 맨발의 소희. 저수지 장면은 너무 슬펐다.
▶정주리 감독: “실제 그랬다. 맨발로 나섰고, 맨발로 발견되었다. 그게 (충격이) 컸다. 실제 주인공에 대한 인상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를 기억하는 사람마다 ‘그런 애가 아니다’, ‘당차고 자기주장 확실하다’고 말을 한다. 마지막에 맨발로 집을 나섰다는 것이 크게 다가왔다. 나름대로 상상을 해보았다. 너무너무 추운데, 맨발로. 마음이 아팠다.”
Q. 저수지 장면은 어디서 찍은 것인가.
▶정주리 감독: “거창에 있는 상천저수지란 곳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어딘가를 알고 쓴 게 아니다. 막연하게 이런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밤이 되면 불빛이 없어서 암흑이 되는 곳. 고립된 느낌이 드는 저수지를 상상했다. 그런 저수지를 찾아다니는데 대부분이 낮은 곳에 있었고, 유원지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곳을 발견하고는 보자마자 내려갔다. 내가 상상하던 그런 저수지가 있더라. 한겨울엔 꽁꽁 언다. 촬영하기가 너무 열악했다. 차가 올라가기도 어려워서 처음에는 배제되었다가 더 어울리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곳에서 찍기로 했다. 마지막 회차를 그곳에서 찍었다.”
Q. 처음 실제사건을 다룬 영화 제작을 제안 받았다는데, 기획안에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정주리 감독: “2020년 말, 제자사 대표가 콜 센터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망사건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혀 몰랐던 일이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도 찾아보게 되었고. 그 프로그램 보고나서 든 생각은 ‘고등학생이 왜 그런데 가지?’와 ‘학교가 왜 그런 곳에 학생을 보내지?”였다. 사건이 일어났던 그 당시에는 대통령 탄핵심판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여서 거리감이 컸던 모양이다.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제작사는 규모가 큰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장르영화로. 고민을 해 보겠다고 하고선 시간을 들여 트리트먼트를 썼다. <다음 소희>에 나오는 게 그 속에 다 들어있다. 구조, 인물, 중간에 죽는 것, 주요한 사건들, 제목까지. 처음 제안받았던 상업영화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제작사 대표를 만나 ’제대로, 꼭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은 규모로라도 해 보자‘고 흔쾌히 받아주셨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그런 일이, 현장실습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의 책(<열여덟,일터로 나가다>)을 보고 전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이후 벌어진 이야기,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사가 처음 제안했고, <그것이 알고 싶다>로 문제의식이 촉발되었다.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은 허 기자의 책인 것 같다.“
Q. 인턴사원, 수습 실습생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특별한 케이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계에도, 영화판에도 만연한 일이다.
▶정주리 감독: “예전에는 어떤 일이 생기면 당연히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하면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 나도 그 일원이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었다. 가해자는 아닐지라도 방관자 정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뉴스 접할 때는 나도 분노한다. 그러면서 ‘왜 그런 곳에서 일을 하려고 하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린다. 사건은 파묻혀버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살지 않았나. 이번 영화를 찍으며 8~9년 전 <도희야>와는 환경이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을 알았다. 그 때는 제한시간도 없었고, 무조건 찍어야했다. 스탭과 배우들이 모두 그렇게 촬영했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다 소희였던 것이다. 비판 없이 일한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지금은 완전히 개선되었을까.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을 것이다.”
영화 '다음 소희'
Q. 데뷔작 <도희야> 이후 두 번째 작품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
▶정주리 감독: “‘도희야’가 2014년에 개봉해서는 3년 정도 그 영화와 함께 한 것 같다. 관객들과 만나는 그런 것들이. 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 했다. 그런 작업이 3년이나 걸렸다. 혼자 써다보니 외부활동도 거의 안하고 잠적하다시피 했었다. 제작하려고 보니 투자자가 중요하더라.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결국 안 되었다. 도저히 영화로 만들기는 힘들겠다고 완전히 포기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렇게 6년이 걸렸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내가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기도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고 지냈다. 코로나까지 있으면서 그 기간이 더 길어졌다.”
Q. 배두나가 연기한 유진의 역할은 무엇인가.
▶정주리 감독: “일단 소희를 평범한 학생으로 묘사하려고 했다. 평범하다는 것은 사실, 개성이 있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면이 있다. 같은 차원에서 유진이도 그렇게 그렸다. 사고현장에 당장 나타날 수 있는 직업은 형사일 것이다. 그리고 공직자라는 곁들여지면 좋을 것이다. 그 때 경찰은 한 것이 없다. 전(前) 팀장이 사건을 덮었던 것처럼. 단순자살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불만. ‘그 때 그러지 않았으면’하는 안타까움. 이런 캐릭터는 그 기자 분을 포함하여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 많은 분들을 대표할 것이다. 그분들이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들이 느꼈을 절망감을 보여주려고 했다. 유진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바른말을 하는 것이 특별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다음에 오는 절망감과 무력감을 더 부각시키고 싶었다. 학교를 찾고, 교육청을 찾았을 때 그곳 책임자가 ‘적당히 하자’라고 할 때 그 말에 달리 항변할 수 없는 처지. 공감이 가는 지점일 것이다. 그렇지만 소희의 심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Q. <도희야>에 이어 <다음 소희>에서도 보호자,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고 한을 풀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주리 감독: “고작 두 편을 만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비슷한 점도 많다. 난 독보적인 비극을 만들고 싶었다. <도희야>는 허구의 이야기이고, 두 인물이 서로 만났기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그런 이야기 전개이다. 전형적이기도 하다. 이번 <다음 소희>는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아서 비극이 된다고 할까. 1부에서 보여주는 소희의 죽음은 유진으로 대변되는, 그런 존재가 없었기에 혼자 그런 비극을 맞는다. 2부에서는 소희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즉 소희가 없이 때문에 유진이 겪는 비극이다. 서로 만나거나,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부재(不在)하기에 생기는 비극이다. 그런 드라마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이다. 사실적인 요소를 최대한 반영해서 만들었다. 사실이 아닌 부분에서도 사실에 가깝게 건조하고 담담하게 담으려 했다. 그런 시선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했다.”
정주리 감독
Q. 실제 일어난 사건을 사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정주리 감독: “일단은 최대한 저 자신이 들어가려고 한 것 같다. 그렇다고 직접 취재를 다닌다거나, 콜센터를 찾아가서 상담을 해보거나, 유가족을 만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접근은 일절하지 않았다. 창작자로서 거리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다 취재해온 것을 바탕으로, 제가 상상할 수 있다고 봤다. 그게 제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쓸 때 거리감을 가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월급 명세서의 액수까지 사실적인 것을 보려주려고 했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신경을 쓴 부분이다.”
Q.여러 문제들을 콕 집어서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주리 감독: “사실 ‘다음 소희’라는 제목이 탄생한 순간이 있다. 시나리오 작업 시작하며 트리트먼트를 쓸 때, 쭉 써내려가다가 택배회사를 찾아가서 태준이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태준이 택배상자를 쌓는 것을 봤을 때 ‘다음 소희’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때만 생각해도 ‘절망적이다’. 그 순간은 그게 컸던 것 같다. 유진이라는 인물이 있고, 또 영감 받는 그런 분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다 보시고 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마울 것 같다.”
Q. <도희야>의 도희도, 이번 작품의 소희도 피해자이며 약자이다.
▶정주리 감독: “영화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이 주는, 영화가 주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이어야 한다. 도희도 그렇고 소희도 그렇다. 소외된, 현실의 약자라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하나의 조건이 되었을 때 그 인물이 느꼈을 감정을 영화를 통해 표현해 보고 싶었다. 같이 느껴보고 싶은 게 영화를 만드는 동력이 된 것 같다. 도희는 그냥 피해자로 머물지만 않는다. 소희는... 그런 감정을 확장하여 담아내고 싶었다..“
Q. 제작자가 상업영화를 기대했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어야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정주리 감독: “제작사와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소재가 중요했던 것 같다. 어떤 모습이 되었든지 그 이야기를 제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많은 관객이 보면 좋으니까.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제작사가 동의한 것이니. 영화사 대표(김동하)가 기자출신이다. 그리고 이 영화 상업영화가 아닌가? 난 대중영화라고 생각한다. 커머셜한 지는 모르겠지만 퍼블릭하다고 어필 하고 싶다.”
Q. <도희야>에 이어 <다음 소희>를 감독했다. 제목에 ‘희’자 돌림을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정주리 감독: “‘도희’는 중학교 때 친구 이름이다. 친하지는 않았는데 제목으로 쓰였다. 꽤 오래 전에 권효선 작가의 단편소설 ‘손톱’을 읽었었는데 주인공이 ‘소희’이다. 소희는 대형마트, 창고에서 일하는 친구이다. 그 친구를 본 감흥이 커서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 이름 쓰고 싶었다.”
영화 '다음 소희'
Q. 소희가 마지막에 남긴 영상, ‘라스트 댄스’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정주리 감독: “감독으로서의 의도가 있지만, 관객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시기 전에는 몰랐으면 한다. 이 영화는 마지막 그 장면을 위해 만든 셈이다. 그 장면을 위해 모든 것이 조율되었다. 밝힐 수 있는 것 하나는 소희의 마음도 있겠지만 연출자로서의 의도가 있다면 마지막 그 장면만큼은 유진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런 희망을 못 느꼈을 유진에게 소희가 남긴 것일 수도 있다.”
Q. 혹시 시나리오를 쓰면서 감독님이 감정이 북받쳐 오른 장면이 있는지.
▶정주리 감독: “노래방 장면. 시나리오를 쓸 때도 감정이 울컥했었다.”
정주리 감독
2017년 1월, 전주의 한 대기업 협력회사 콜센터 현장실습생(특성화고등학교 졸업예정자)의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다음 소희>는 지난 8일 개봉되었다. 한 번 보시길 권한다. 정말 좋은, 괜찮은, 훌륭한 영화이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