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촛불세대에게 전하는 1987년의 엽서가 방금 도착했다. 1987년의 뜨거웠던 민주화 현장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긴 <1987>을 만든 장준환 감독을 만나봤다. 지난 18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장 감독으로부터 영화 '1987'과 대한민국 '2017'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김경찬 작가의 초고가 흥미로웠다. 남영동의 박처원 처장이라는 안타고니스트를 뼈대로 놓고 나머지 많은 인물을 배치하는 것이 신선하고 재밌었다. 자료조사를 하면서 이 사건 자체가 주는 드라마틱함이 대단했다. 창작을 하더라도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시나리오가 좋아서 이 프로젝트를 하였나? “처음 건네받았을 때는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애들을 위해서라도 큰 족적을 남길 영화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과연 만들어질 수 있을까하는 원초적인 고민을 했다. ‘내 운명인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면서, “왜 여태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영화로서도 그렇지만 역사로서도 충분히 토의되고 이야기되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영화 <1987>은 1987년의 대한민국을 보여준다. 몇 해 전 tvN의 <응답하라 1988>의 신원호 피디는 불과 30년 만에 한국이 너무 발전하여 화면에 담을 곳이 없더라고 푸념 아닌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장 감독도 같은 생각인 듯. “촬영지나 소품 구하기가 어려웠다. 전국을 다 돌아다니며 어렵게 찾아냈다. 우리나라가 불과 30년 만에 이렇게 변했나. 그 때 느낄 수 있었던 그런 느낌이 사라져 버렸구나. 우리나라가 정말 빨리 바뀌었구나.”고 생각되었다.“
소품 이야기가 나와 하나 물어보았다. 영화를 유심히 보면 남영동 경찰들이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 뉴스를 소니TV를 통해서 시청하는 장면이 있다. 왜 소니TV일까? “그 당시 남영동에는 CCTV가 설치되어있을 정도였다. 그때 방송장비를 많이 수입했으니까 그 TV도 갖다 놓지 않았을까. 그런 부분까지 유추해서 집어넣었다. 학생들은 아남TV이고. 그런 기억들을 되짚어 가면서 찍었다.”고 대답한다.
영화에는 실존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시사회 반응을 들은 것이 있는가? “하정우 배우가 연기한 최환 검사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자기는 술꾼이 아닌데라고 말씀하셨다더라.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고, 그리고 감사드린다고 전하고 싶다.”
장준환 감독은 30년밖에 지나지 않은 역사를 다루는 자세를 이렇게 표현했다. “실화 자체가 주는 드라마적 긴장감이 있다. 실제 사건에 최대한 가깝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대중이 보는 매체라서 신경 써야하는 곳이 있다. 영화적인 재미, 캐릭터가 주는 힘. 그러나 실화에 묻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최대한 노력했다.”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최상의 캐스팅이었고, 캐스팅 배우들은 최선의 연기를 한다. 하정우의 캐스팅에 대해 “일단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다. 내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시나리오가 나오면 보여 달라고 했었다. 당시에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였다. 네가 맡을 역은 하나밖에 없을 것 같다면서 보여줬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린다. 이어 배우들이 잇달아 합류하면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 "우리가 주인공이구나"
장준환 감독은 <1987>이 어렵게 만들어졌다는 점을 이야기하면 그렇게라도 만들어야하는 이유에 대해 “사실은 젊은 세대에게, 우리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따뜻함이 있고,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우리가 주인공이구나,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올해 광장에서 촛불을 본 기억이 있기에, 최루탄 냄새가 흥건했던 당신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함께 공감하기를 바랐다.”
시사회날 기자간담회 중 장준환 감독은 울컥하여 눈물을 보였다. 이날 인터뷰 때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눈시울을 적신다. “영화 마지막에 문익환 목사의 영상을 보여준 것도 두 열사 외에도 많은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싶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런 함성이 있었고, 지금의 성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엄청나게 행복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왜 그럴까. 그 때 그렇게 순수하고 뜨거웠던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그러면서 “아파트 값은 왜 이렇게 오르고, 그 때 그 광장에 나왔던 그 분들은 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물어봤다. “재수하고 89학번이다. 난 이른바 ‘낀’ 세대이다. 치열하게 데모하던 학생은 아니었다. 실존적인 고민을 많이 하던 대학생이었다.”란다.
● 지구를 지켜라, 대한민국을 지켜라
잠깐 옛날이야기. 장준환 감독은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로 ‘천재감독의 탄생’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물론 흥행은 대실패로 돌아갔디만 말이다. “그런 말은 지금 들어도 부담스럽다. 10년 넘게 신작을 못 만드는 천재가 있을까. 사실 이 영화도 ‘지구를 지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치기어린 작품이다. 만들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나의 젊은 시절이었다.”
<지구를 지켜라>이후 장준환 감독은 <파트맨>이라는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했었다. 워낙 오래된 프로젝트인지라 어떻게 진행되는 궁금했다. “일생의 목표로 두고 있는 작품이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워낙 대중적이지 않은데다 예산도 많이 들 수밖에 없는 히어로 물이다. 잘 되면 언젠가는 하겠죠.”란다. (혹시 장준환 감독의 <버드맨>을 보는 것은 아닐지 기대된다)
다시, 1998년!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뻔한 대답이 될 수 있겠지만 창작자에게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1987’은 우리를 되돌아보는 거울이다.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는지 돌이켜보게 한다. 그 안에 몇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담아보려고 했다.” 감독의 정리하지 못한 말이 무슨 말인지 짐작은 간다.
<1987>은 시사회 이후 언론들이 격찬을 받았다. 부담이 대단할 듯. “상업영화이니 흥행에 대한 부담이 있다. 연말에 이런 구도로 개봉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1987’은 완성되었다는 것이 의미가 크다. 만들어진 것 자체가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면서 “만든 분, 투자한 분이 손해는 안 봤으면 한다.” 손익분기점은 어느 정도일까. “400만이란다. <여배우는 오늘도>를 만들었기 그게 얼마나 높은지 잘 안다.”고 덧붙인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장준환 감독의 아내 문소리가 연출하고 연기한 독립영화이다. 지난 9월에 개봉하여 전국관객이 1만 6천명이 들었다. <여배우는 오늘도>와 <1987>의 제작사는 ‘영화사 연두’이다. 장준환-문소리 부부의 딸 이름이 ‘연두’란다.
“이런 영화는 좀 많이 봐야할 것 같다”고 하자 속내를 드러낸다. “사실 욕심은 그 시대의 살았던 부모님들이 ‘엄마아빠는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어’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아이들 손을 잡고, 같이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 속물처럼 보일까봐 이런 이야기는 안하려고 했는데...”란다.
천재영화감독, 눈물 많은 영화감독 장준환 감독은 어떤 영화를 좋아할까. “여러 장르의 영화를 좋아한다. 유니버셜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정복자 펠레>, 프랑스 영화 <증오>, 친구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를 너무 좋아한다. ‘현기증’을 패러디한 <고소공포증>(High Anxiety) 이런 것도 굉장히 좋아한다.”
출연 배우들에 대한 연기평을 부탁하자 워낙 진지한 주례사 평을 이어가서 생략한다. 다만 김태리에 대해서는 “저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고 정돈되어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영화계의 큰 보석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문소리를 이을?”이라고 하자 크게 웃으며 “그 이야기 하려다가 말았다.”고 응답했다.
배우자 문소리는 연기를 더 잘하는지, 연출을 더 잘하는지 물어봤다. “얄밉게도 둘 다 잘한다.”면서 “사실 한 집안에 감독이 둘이라는 것은 썩 달가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라고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장 감독은 “제가 울었던 게 창피하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유가족 분에게 영화가 좋았다는 말씀해 주신 게 너무 안심이 된다. ‘이제 됐어’라고 저 스스로를 다독여주는 것 같다. 이젠 뭘 해도 편안해진 것 같다.”고 한다.
이어 “1월 15일은 박종철 열사님 기일이다. 남영동에 가면 고문현장이 ‘경찰인권센터’로 꾸며져 있다. 영화 보시고, 잊지 마시고, 어떻게 고초를 받았는지...”
영화 <1987>은 12월 27일 개봉한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