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영화 개봉을 앞두고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그리고 개별 인터뷰를 통해 홍보사 측은 누가 '유령'인지 밝히지 말라고 주문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영화를 안 봐도 짐작이 갈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설경구는 유령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궁금하면 직접 보시길. *
1999년 열린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었다. 그런데 그해 BIFF(당시엔 PIFF로 표기)에서는 설경구가 출연한 영화가 무려 네 편이나 상영되었었다. ‘박하사탕’과 함께 ‘송어’,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그리고 ’유령‘(민병천 감독의 잠수함 영화)이다. 그렇게 21세기 한국영화는 설경구가 활짝 열었다. 그리고, 2023년. 설경구가 <유령>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잠입한 스파이(항일독립군) ’유령‘을 색출하는 것이다. 설경구가 ’유령‘일까? 일본 제복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의심이 간다. 왜? 그는 카멜레온 연기자 설경구니까. 영화 개봉을 앞두고 설경구를 만나보았다.
Q. 코로나 시국에도 ‘자산어보’부터 ‘킹메이커’, ‘야차’,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등 설경구 출연작들이 계속 이어졌다.
▶설경구: “저의 의지가 아니다보니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공개되니 말이다. 곧 ‘길복순’도 개봉될 것이고, 또 다른 작품도 여름 안에 공개될 것 같다.”
Q. 이번 작품에 출연한 이유는.
▶설경구: “일단 그 시대가 배경인 영화를 안 해 봐서 끌린 것 같다. 배우들은 반복되는 것을 싫어한다. 물론 제가 하는 것이라 반복될 수밖에 없겠지만 시대가 바뀌고 의상이 바뀌면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해영 감독의 이번 작품은 항일투쟁 뿐만 아니라 장르의 변주로 차별성을 갖고 싶다고 하더라. 그게 좋았다.”
Q.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뺀다면 앞부분은 추리소설, 후반부는 액션영화이다.
▶설경구: “내가 감독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규모가 큰 편이다. 상업적인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추리만 갖고 두 시간 넘게 끌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유령을 잡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호텔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호텔을 나와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다른 장르로 변주되는 느낌을 준다. 배우로서 그러한 이야기에 부담감이나 거부감이 없었다.”
Q. 설경구가 ‘유령’인가?
▶설경구: “그게 저의 반전이다. 내가 연기한 인물은 영화에서 기능적으로 쓰이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태생적으로 정체성의 혼란, 혈연에 대한 콤플렉스 등으로 복합적으로 꼬인 인물이다. 그래서 감독에게 처음부터 ‘유령’처럼 연기하겠다고 했다. 내가 유령처럼 하겠다고 해서 유령이라고 드러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에 반전이 있을까? 없을까? 그게 반전이라고 생각한다.”
Q. 인물간의 촘촘한 관계가 영화를 이끌어간다.
▶설경구: “개인적으로는 5명의 인물을 더 촘촘하게 엮어 이야기를 집중했으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호텔에서 등장하는 어떤 인물은 없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곁가지 같은 느낌이다. 하하하”
Q. 중국 원작소설보다는 중국영화(바람의 소리)가 그나마 알려져 있다.
▶설경구: “그 영화는 나도 오래 전에 봤다. 그 작품은 호텔(고립된 성) 내부에서 펼쳐지는 추리물의 성격이 강하다. 그곳을 나와서는 ‘권총’이 복수하는 내용인데 ‘유령’을 잡는 게 목적인 작품이었던 것 같고, 우리 작품은 더 나가는 이야기가 있다.”
Q. 일본어 연기에 대해서.
▶설경구: “내가 한 대사 중 1/3 정도가 일본어였다. 박해수는 전체가 일본어였다. 일본어 연기는 어렵다. [역도산] 때 고생을 해서 그런지 이번에 부담이 조금 덜 되더라. 발음 하나하나 꼼꼼하게 체크하고, 안된 것은 후시로 보강했다. 박해수에게는 내가 노하우를 전수해 줄 게 없었다. 원래 박해수가 연기하는 카이토 역은 일본배우가 출연하기로 되어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불발된 것이다. 박해수는 2주 동안 일본어 선생님과 합숙하며 배역을 준비했단다. 난 일본어 연기를 한 시간만 하면 혀가 꼬이는데 박해수는 정말 잘하더라. 그런데 제일 먼저 촬영한 신이 식당에 다 같이 모인 장면이었다. 저는 가만히 앉아있지만 해수는 왔다갔다하며 일본어로 대사 내뱉고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 기운이 대단했다. 촬영 끝나자 다들 박수쳤다.”
Q. 이하늬 배우와의 액션 연기에 대해서
▶설경구: “나는 액션을 잘 못한다. 힘으로만 하는 것 같다. 내가 통뼈라서 상대배우를 치게 되면 큰일 이다. 하루 이틀 지나니 잘 받아줘서 편하게 액션 연기를 한 것 같다. 상대가 힘들어하면 제가 미안해지는데 이하늬 배우는 전혀 그런 부담을 주지 않았다. 첫 번째 액션은 제가 방어적인 입장으로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몇 장면은 편집에서 잘렸다. 그걸 다 붙였다면 정말 웃겼을 것이다. 그 액션신은 3~4일 찍은 것 같다. 그 전에 나오는 호텔 내부액션은 이틀 정도 찍었다.”
Q. 후반부 공회당 장면에서는 철저한 반민족 인물이 되어버린다.
▶설경구: “캐릭터 특성이다 자기 안에는 조선(의 피)이 있기에 그것을 지우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조선을 경멸하지만 결코 그것이 안 지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공회당에서 그런 일장연설을 하는 것 같다. 연민도 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본래 명문 군인가문의 후손인데, 그렇게 좌천되어 사무실에 앉아서 도장이나 찍는 입장이 되니, ‘유령’을 잡는 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해수가 연기한 카이코 역을 내가 맡았더라도 연민이 생겼을 것 같다.”
Q. 포스터를 보면 누가 ‘유령’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설경구: “헷갈리게 만드는 재미도 있다. 포스터에 이름 나오잖은가. 난 이하늬, 박소담, 설경구 순으로 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제작진이 난색을 표하더라. 나이순으로 가자고 그랬다.”
Q. 총기 액션
▶설경구: “총 쏘는 것이 어렵다. 눈을 깜빡거려서. 소품용 총이지만 위험하다. 탈출할 때 쫓아가면서 총을 쏘는데, 내 뒤를 따라오는 군인들도 마구 총을 쏜다. 내 머리 뒤쪽으로. 흥분하며 쏘아대는데 위험하다. 아무리 소품일지만 쏠 때의 공기압이 느껴진다.”
Q. 1999년에 같은 제목의 <유령>에도 출연했었다. 최민수, 정우성 주연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하여 액션 신을 펼쳤다. 기억나는지?
▶설경구: “여수에서 큰 배에서 찍었었다. 그때는 액션 촬영 현장이 살벌했다. 긴장도 되고, 큰소리도 나고. 정두홍 촬영감독의 혈기가 넘쳐나던 때였다. 무술팀도 긴장하게 된다. 요즘 현장은 많이 부드러워졌다. 예전엔 ‘나를 따르라’라는 분위기였다면 요즘은 의견 나누고 그런다. 안전장치도 생겼고. 전에는 스턴트맨 보호하는 장비도 없었다. 바다에 그냥 뛰어들고 그랬다.”
Q. 그동안 자신이 맡은 역할 중 가장 연민이 가는 역할은 무엇인가.
▶설경구: “연민은 다 있지만, 그래도 <박하사탕>의 김영호겠죠. 후유증이 오래 갔다. 괴로울 정도로 오래 갔다. <박하사탕>할 때 내 나이가 32살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마흔 좀 더 됐었고. 그때 ‘같은 또래 아니었나’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내 얼굴이 좀 나이 들어보였다. 그래도 여태 그 덕을 보지 않느냐.”
Q. 이해영 감독의 디렉팅 스타일이 있다면.
▶설경구: “아주 정확하다. 정확하게 좌우대칭, 위아래를 맞춘다. 모자 쓰는 것도. 모자를 왼쪽으로 삐뚜름하게 쓰고 있으면 ‘모자 챙 1밀리만 내려. 반대쪽 2밀리만 내려’라고 말한다. 저는 미치겠더라. 공회당 신에서는 제복과 모자를 다 갖추고 연기를 하는데 결국 모자를 벗었다. ‘1밀리만 내려’, ‘2밀리만 내려’ 이런 데 신경 쓰면 연기를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그만큼 이해영 감독은 디렉팅이 꼼꼼하다.”
Q.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에 또 출연할 생각은 있는지.
▶설경구: “사극을 한 번도 안 해봤기에 <자산어보>에 나오고 싶었다. 흑백일 줄 몰랐다. 예산이 없어서 흑백이라는 것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개런티도 못준다고 했다. 괜찮다고 그랬다. 흑백이라도. <자산어보>는 내가 안 해본 사극이라서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라면 곧 바로는 출연을 안 하겠지. 다른 시대 찾아봐야죠. 독립군 이야기는 많이들 하니까.”
설경구, 이하늬, 박소담, 박해수, 서현우 등이 출연하는 이해영 감독의 항일첩보액션추리물 <유령>은 내일(18일) 개봉한다.
[사진= CJ ENM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