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아 - 뮤지컬 '이프/덴'
정선아가 돌아왔다. 고등학생 때 당돌하고도 당당하게 오디션을 통해 뮤지컬 ‘렌트’ 무대에 섰던 정선아는 이제 무대 경력 20년을 넘어선 뮤지컬 장인이다. 그동안 ‘아이다’, ‘에비타’, ‘위키드’,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들의 주인공으로 그야말로 무대를 씹어먹는 배우이다. 결혼과 출산으로 잠깐의 공백기를 거친 뒤 지난 달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프/덴]의 히로인으로 복귀했다. ‘이프덴’은 ‘넥스트 투 노멀’의 작가 브라이언 요키와 작곡가 톰 킷의 작품으로 뉴욕을 배경으로 39살 엘리자베스의 인생 이야기이다. 정선아는 엘리자베스가 겪을 두 개의 삶, ‘베스’와 ‘리즈’의 삶을 한 무대에서 동시에 보여준다.
“하하하. 떨린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라서. 공연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출산하고 복귀작으로 선택한 작품이라 매일매일 행복하게 공연하고 있다. 다시 무대에 서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감사하다.”
Q. 결혼, 출산 후 첫 무대 복귀작이 <이프/덴>이다. 소감부터.
▶정선아: “한국에서 초연되는 작품이다. 초연에 복귀작이라서 고민이 많았다. 분량도 많고, 여태 안 해본 스타일이어서. 큰 극장에서 공연하면 관객들과 멀리 있기에 마음이 편한데 이번엔 작은 극장이라 객석 관객을 가까이 마주하게 되니 떨린다. 다른 공연의 경우 몇 차례 무대에 서면 긴장이 덜 되는데, 이건 여전히 떨린다. 체력소모도 많다.”
뮤지컬 '이프/덴'
Q. [이프덴]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정선아: “여자의 이야기이고, 저랑 비슷한 면이 있다. 특별히 뭔가를 더 하지 않아도, 저의 상황에 맞춰 연기를 하니까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 같다. 그동안 못 보여준 것을 실컷 보여주고 있다. 대극장에서 화려한 의상에 큰 가발로 관객분들 멀리서 만나봤었는데, 이건 자연스러운 우리의 이야기라서 의외로 좋아해주신다. 그동안 공연을 하면 ‘정선아가 노래를 시원하게 잘하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공감이 간다’, ‘계속 보고 싶고, 볼수록 메시지를 찾게 된다’, ‘위로를 받는다’는 평을 들었다.”
정선아
Q. 정선아 배우가 아니면 누가 소화를 할 수 있을까. 어려운 넘버가 많은 작품이다. 시작할 때 어땠나.
▶정선아: “작품이 너무 좋지만 걱정이 많았다. 주인공이 계속 무대에 나와 있어야하고, 노래도 강하고, 연기도 힘들다. 드라마가 강한 작품을 하고 싶은 갈증이 있었다. 그동안 예쁘고, 인상 깊은 역할을 많이 했었다. 언젠가는 소극장에서 관객과 아이컨택을 하는 공연을 하고 싶었다. 임신 출산과 함께 운명같이 내게 찾아온 작품이다. 첫 공연 올라갈 때 관객들이 어떻게 보실지 두려웠다. 지금은 내가 선택한 순간 중에 가장 잘한 선택이 바로 [이프덴]이라고 생각한다.”
Q. 임신과 출산을 직접 겪고 보니, 작품을 보는 눈이 다르겠다.
▶정선아: “배우로서 걱정이 있었다. 배우란 직업은 자신을 보여주는 직업이다. 이번만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이를 낳으면 목의 근육도 늘어난다는데. 아이를 갖고 살도 20킬로 넘게 쪘었다. 고민의 연속이었다. 아기 낳고 일이 잘 안될까 봐. 관객들이 날 잊어버리고, 관심을 안 가져주면 어쩌지. 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대사량이 많고 노래가 어려운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울면서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이프덴]은 저의 인생 1막을 갈아 넣은 2막의 시작입니다.”
Q. 뮤지컬 [이프/덴]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선아: “뮤지컬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다. 1막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저와 비슷한 것 같다. 평생 뮤지컬만 했다. 중2부터 뮤지컬에 빠져, 뮤지컬 배우를 꼭 하고 싶다는 열정을 가졌다. 그러니 그렇게 되더라. 베스도 앞만 보고 달려온 커리어우먼이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하면서도 다시 사랑하게 되는 리즈도 있다. [이프덴]을 통해 뮤지컬 인생 20년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 낳고. 고민에 빠져 사는 리즈의 삶도 이전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에 [안나 카레리나]에서도 아이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을 하고 연기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막에서 ‘혼자가 되는 법’을 부를 때 연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아이를 생각하고 나의 삶을 생각하게 되더라. 경험이란 게 배우에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시기에 캐릭터의 삶이 베어 나온 것 같다. 이 시점에 운명이요 축복이다.”
Q. [이프/덴] 프레스콜 때 노래가 너무 어려워 음치, 박치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선아: “정말이지 이 작품은 연습의 최고봉 같다. 노래를 멋있게 부르고 싶은데 이건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작품이다. 작곡가와 작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엄청 울게 하고, 그런 감정을 갖고 노래를 부르게 해 놓았다. ‘노래를 포기해? 연기를 포기해?’ 저의 무기라고 생각한 소리에 대한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의 울림이 더 있었다. 마지막에 ‘결국 다시 시작’(Always Starting Over)라는 노래가 공연의 하이라이트인데 노래가 어렵다. 리즈는 눈물 콧물 다 쏟고 부른다. ‘그래도 내 삶이 힘들었고, 고민이 이랬지만 난 어떤 것도 굴복하지 않고, 덤덤하게 내 길을 가겠다’는 내용이다. 처음 연습할 때 멋있게 불렀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안 좋을 때 연기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 그런데 그걸 들은 스태프들이 감동받더라. 노래는 조금 잘못 되었지만 이게 정말 진실한 교감이구나. 관객들은 이런 것을 보러 오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을 하면서 노래라 생각하지 않고 대사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감동이란 게 노래를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기적인 측면에서 오는 게 참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우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Q.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는가.
▶정선아: “어떤 선택이든 나의 선택이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라. 시련 좌절이 있더라도 굴복하지 말고, 묵묵히 걸어간다.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결혼도 선택이고, 이렇게 결혼하고 아이 낳고 복귀한다. 그런 1분, 1분이 모여 인생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Q.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할 때 유난히 감정이 북받쳐 오르겠다.
▶정선아: “저는 저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 복귀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 이전과는 또 다른 사랑이니. 커튼콜을 할 때 많이 울었다. 복귀라는 것은 제 인생에 없을 줄 알았다. 뮤지컬배우로서 멋지게 박수칠 때 가야지 생각했었는데 선택에 따라 이렇게 변하는 모양이다. 때로는 지름길일 수도 있고, 빙빙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겠지만 그 길을 간 것이다. 무대로 돌아온 저에게, 새로운 인생을 박수쳐 주시는 것 같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Q. 뮤지컬 배우로서의 단단한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인생을 고민할 때 가장 우선시 하는 것들이 있다면.
▶정선아: “그건 선택의 기로마다 다를 것 같다. 갑자기 의리? 믿음? 같은 단어가 생각난다. 제가 뮤지컬 한 길로 꾸준히 살아왔잖아요. ‘정선아가 디바가 되었다’라는 관객의 기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 물론 동료에 대한 믿음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욕심이 없다고 인터뷰 했는데 생각해 보니 욕심이 많은 것 같다. 제가 팬들에게 받은 사랑, 배신하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서 그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다.”
뮤지컬 '이프/덴'
Q. 자신의 롤 모델이 있다면
▶정선아: “최정원 선배님. 뮤지컬을 오래 하셨는데 그 나이에도 후배 못지않게 자기관리에 철저하시다. 이전엔 몰랐는데 저에게도 후배가 점점 생기면서 알게 되더라. 선배는 후배보다 더 건강하다. 에너지가 넘친다. 항상 긍정적이시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대단해 보인다. 남경주 선배님도. 1세대 선배는 대단하다. 척박한 뮤지컬 환경에서 무대를 펼치신 것이다. 저야 뮤지컬 황금기, 호시절에 너무 잘 지냈잖아요. 선배들이 무대를 지켜주셨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다. 뮤지컬을 꿈꾸는 후배를 위해 더 멋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제가 그런 나이가 되었네요.”
Q. 그럼, 뮤지컬업계 후배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한다면.
▶정선아: “어린 천재는 있어도, 나이 먹은 천재는 없다고 한다. 제가 19살에 혜성같이 나타난 천재란 소리를 들었지만 나이 들어가며 노력하고 자기만의 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자기가 했던 것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세상을 점점 변하고, 다른 창법도 나온다. 그에 맞춰 내가 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해야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끝이 없다. 무대에 오를수록 배울 게 많다. 쉬지 않고 단련시키면 관객에게 오래 사랑받는 배우가 될 것이다.”
Q. 다른 매체, 장르에 도전하고 싶지는 않는지.
▶정선아: “지금 미디어와 공연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나는 뮤지컬 무대에 있을 때가 너무 행복한 것 같다. 작품 홍보 때문에 예능에 출연할 때 떨린다. 무대 앞에는 열정이 살아나고, 관객이 많아도 편하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는 불안하다. 그리고, 축가 부를 때도 너무 불안하다. 마이크 들고 뜬다. 역시 나는 무대 체질인 모양이다.
뮤지컬 '이프/덴'
Q. 자신의 인생 2막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정선아: “그렇다. 어떻게 써내려갈까. 1막은 뮤지컬에 대한 무모한 사랑, 열정, 동경으로 시작했다면 이제 그런 사랑의 시대는 가고, ‘뮤지컬하면 정선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대를 책임지고 싶다. 제 인생 2막은 앞만 보고 달려온 1막과는 달리, 책임감과 함께 주위를 아우를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Q. 자신의 일에 운은 어느 정도 따르는 것 같은가.
▶정선아: “저는 운이 좋은 편인 것 같다. 사랑받은 작품도 있고,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받은 작품도 있다. 어릴 때는 작품의 흥행이나 수익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냥 행복했는데, 이제는 예민하게 수익을 생각하게 되더라.”
“난 기회가 주어지면 확실하게 잡는 아이였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뮤지컬 공부를 했다. 뮤지컬을 너무 사랑했기에 오디션을 위해 공부한 것이다. [렌트] 때는 그 작품이 너무 좋아 대사를 다 욀 정도였다. 어느 순간 기회가 왔고, 그걸 잡은 것이다. [렌트]는 마약과 폭력, 욕이 많이 나오는 작품인데 그 때 고등학생이 그런 작품을 준비했었다. 열정적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시작했는데 생각대로 안 되는 때도 있었다. 우울한 필요는 없다. 너무 큰 사랑을 받았을 때도 자만하지 말라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운도 많이 따른 편이다.”
정선아
Q. 20년 뮤지컬 원동력, 앞으로는
▶정선아: “진심으로 관객 덕분이다. 아무리 잘 났더라도 관객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슬프고 불행할 것이다. 20년 동안 잘 버텨온 무대에서, 사랑과 열정을 불태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그게 원동력이다. ‘내가 다 잘났어’하고 자만할 때가 있었지만 그런 풋내기 시절이 지나갔다. 모든 것에 감사드린다. 관객에게 감사하고, 동료 스태프에게 감사하다. 묵묵히 관객 분을 계속 만나고 싶다. 좋은 에너지 받을 수 있게 무대만 생각한다.”
“정말 어릴 때 데뷔하여 20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 한 분야에서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기념하고 싶었다. 재능기부를 하고 싶었었다.” 정선아 배우는 2021년 ‘기부콘서트’를 열었다. 콘서트 수익금은 한부모·장애인 등을 위해 기부한단다.
‘리즈’와 ‘베스’의 엇갈린 삶을 사는 정선아의 선택은 뮤지컬 ‘이프덴’에서 만날 수 있다. 2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쇼노트/팜트리아일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