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성평등을 향한 화해는 법적 책임 위에서만 가능하다!”
『혐오와 수치심』, 『타인에 대한 연민』 등 약자와 차별에 대한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로 국내에서도 반향이 컸던 세계적인 석학 마사 너스바움이 성희롱과 권력 남용의 관계를 분석한 『교만의 요새』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모든 차별과 폭력이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랜 시간 외면하고 은폐해 온 성범죄의 기저에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권력을 비호해 온 법과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투 운동과 피해자들의 공개적인 수사 요청 등으로 이전보다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법적 보호 장치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에서 밝힌, 남성들이 여성을 자발적인 노예로 만드는 방식부터 여성의 참정권 운동을 펼쳤던 엘리자베스 스탠튼의 연설, 포르노 산업에 전면으로 반대한 급진적 페미니스트 철학자 안드레아 드워킨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대상화되고 착취되어 온 역사를 짚으며, 너스바움은 성범죄는 여성의 ‘대상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여성을 객체로 전락시키고 지배할 수 있다는 남성 지배 권력의 믿음은 타인을, 특히 여성을 온전히 실재하는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에 빠지게 만들어 “평등한 존중이나 온전한 자율성을 부정”하는 일상에서 ‘젠더적 교만’을 가진 남성을 길러내고 있다.
1부에서는 ‘대상화’와 ‘교만’이 왜 성희롱의 근원인지 파헤치고, 2부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왜 법적 절차가 중요한지를 밝히며, 3부에서는 법조계, 예술계, 스포츠계에서 교만과 성희롱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핀다.
●‘보복 감정’에서 벗어나 절차적 정의로
마사 너스바움은 미국법에서 법적 제도가 여성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구체적 사례들을 인종차별의 역사와 함께 설명한다. 특히, 흑인 여성이나 가난한 여성이 당해야 했던 대상화와 판사들의 타당성 기준에 의존하여 강간 사건들이 재판되어야 했던 과거 사례들을 짚고, 인종 문제를 걷어내더라도 여전히 만연한 ‘강간 문화’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투쟁사를 통해 너스바움은 집단적, 공개적으로 가해자에게 창피를 주는 행위가 절차적 정의의 자리를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법적 제도의 미비로 고통받고, 법이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다는 불신에 가로막혀 보복주의적 승리를 갈망하는 일부 여성들에게 너스바움은 법적 책임을 통한 화해의 비전을 제시한다.
너스바움은 페미니스트들의 성취를 인정하며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들에 주목한다. 그는 권력의 부당한 사용, 공소시효 문제, 증거의 사용 방식, 신고 장려 등 성적 자율성과 주체성을 인정하기 위한 구체적 법적 절차들이 개선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너스바움의 분석은 처벌 대상으로서 성범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고취하여, 성범죄로 얼룩진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린다.
●화해는 ‘법적’ 책임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너스바움은 성범죄를 소송의 영역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성을 띠는 법을 통해 일터에서 성범죄와 폭력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보장받고, 법에 근거하여 처벌해야만 섬세하고 공정하게 가해의 심각성을 가늠할 수 있으며 적법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복주의를 따를 때 분노는 강력함과 중요성을 모두 잃는다. 너스바움은 이미 벌어진 일을 밝히고, 동시에 개선책을 찾는 미래 지향적인 ‘이행 분노’로 저항하며 가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지우고, 공유된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 마사 너스바움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자 2014년 인터넷(영어)에서 가장 많이 인용, 검색, 링크된 사상가 22위에 선정되었다.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 고전학자, 여성학자로서 《포린 폴리시》가 선정한 ‘세계 100대 지성’에 두 차례(2005, 2008년)나 뽑힌 석학이다. 시카고대학교 로스쿨과 철학과의 법학·윤리학 석좌교수이며, 고전학과, 신학과, 정치학과에도 소속된 교수다. 미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비교헌법센터를 설립하였으며 인권프로그램 위원이었다. 저서로 『혐오와 수치심』, 『타인에 대한 연민』, 『시적 정의』, 『정치적 감정』, 『선의 연약함』 등이 있다. 옮긴이 박선아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현대 미국시의 모성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뮤리얼 루카이저의 『어둠의 속도』를 번역했고, 주로 여성 작가들과 학자들의 저작을 번역하고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