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무자비함은 큰 역사의 흐름 앞에서 개인이 휩쓸려 피해를 입는 사건들의 존재에서 드러난다. 그러기에 작든 크든, 이러한 사건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의무인지도 모른다.
영화 '2차 송환'(감독 김동원)은 지난 2000년 장기수가 고향인 북으로 송환되어 돌아갔으나 자신의 의지 없이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명단에서 제외된 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2001년 2차 송환 운동을 재개했지만 현재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과 생이별한 채 평균 아흔의 나이로 남한에서 정착한 그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피해자들의 존재에 대해 각인시킨다.
Q.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상영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봉하게 되어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나게 된 소감이 궁금하다.
첫 상영에 사람이 절반 정도밖에 안 찼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원래 웬만하면 다 차는데 송환이라는 단어를 어렵게 느끼고 러닝타임이 156분이라고 하니 엄두를 못 내신 것 같다. 전편인 '송환'은 극장에서 2만 5천, 공동체 상영으로 2만 5천 정도 됐는데 이번 작품은 5천만 되어도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이 작품을 끝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 같다.
Q. '송환'이라는 작품을 20년 전 만든 이후, 이번에는 송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20여 년 넘게 송환 운동을 벌이고 있는 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향 장기수, 그리고 그 원인의 중심에 있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소재에 오랫동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나도 서른 서너 살까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74학번인데 전혀 운동도 안 했고 놀기 바빴다. 그러다가 서른두 살 철거촌에 들어가서 이 사회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서른여섯 살에 결혼을 하며 봉천동 산동네에 전세방을 얻었는데 그때 마침 감옥에서 막 출소를 한 장기수분들이 봉천동 산동네로 오셨다. 봉천동에 계시던 신부님이 신원 보증을 해서 동네로 모셔왔고 갈 곳 없는 그들을 돌봤다. 그때 옆 동네에 사시게 되어서 왕래가 잦게 됐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분들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알면 알수록 역사도 배우게 됐다. (예상외로) 선생님들의 표정이나 눈빛 같은 것들이 해맑아서 더욱 관심이 갔다. 이후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게 됐다.
그 당시에는 '송환'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90년대 초였고 그때는 국가보안법이 크게 뿌리내려있던 시대여서 찍으면서도 무섭긴 했다. 처음에는 계획을 가지고 찍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 와서 장기수분들이 우리 애들이랑 노는 것을 찍고 했는데 99년에 들어섰을 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하며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을 정상회담 전제 조건으로 걸었다. 그렇게 다큐멘터리 같은 형태로 작품을 만들어볼까 생각했던 것이다.
Q. 지난 2001년, '폭력에 의한 전향 무효 선언'을 하고 '2차 송환' 운동을 재개했지만 아직까지 진전이 크게 없고, 이것을 또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립을 보면서 감독 본인도 머릿속에 다양한 혼란이 생겼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해피 엔딩이라기보다는 씁쓸함이 남는 작품이다. 해결되지 않은 사안이고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은 여기에 남아 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 정권이 들어서고 남북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나 나중에 낙담했다. 결국 작품을 하려면 송환이 안되는 엔딩을 염두에 두면서 작품을 끝내야 될 것 같았다. 끝장면을 송환이 되는 장면으로 상상했기에 엔딩 컷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막연했는데 그때 김영식 선생님이 청와대로 가서 1인 시위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그것이 마지막 컷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듯이 편집을 했다. 끝내니까 어느 한 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Q. 기자로서의 시선을 떠나 관객 중 한 명으로서 작품을 보는 내내 가장 크게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죄책감이라는 정서였다. 지하철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대중교통 속에서의 무관심을 보면서 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들 중 한 명이 나라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게 됐다. 아마 이 영화를 접하는 많은 분들도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 같다.
가끔 장기수들을 가리키며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영화에는 담지 않았지만 욕을 굉장히 많이 하기도 하셨다. 나라면 뒤에서 칼로 찌를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국가 보안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면서 저런다", "6.25 비극을 안 겪어봐서 모른다"라는 식으로 폄하하는 분들도 계신데 답답하다. 장기수분들만큼 그 시대에 고초를 겪은 사람을 앞에 두고 "너는 고생을 안 해봤어"라는 말을 하니까.(웃음)
이러한 무관심, 비난, 편견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장기수뿐만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약자들의 심정을 사람들은 잘 모를 때가 많다. 피해자들의 절박함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그것을 깨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다큐멘터리는 소수자, 약자들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Q. 다큐멘터리라는 것이 감독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중요한 갈등에 개입은 하지 않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에 대해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이 작품을 통해 받은 영향 중 어떤 것이 가장 강렬했는가?
내가 장기수들 찍는다고 잡혀갔을 때다. 이유는 그랬는데 영장에는 불법 비디오 제작, 유포라는 다른 죄목으로 청소년과에서 잡아가고 조사는 대공과에서 했다. 90년대 때의 일이었다. 너무 치사하게 나를 음란 비디오를 만드는 사람처럼 만든 것이다. 그때만 해도 허가받지 않은 프로덕션에서 작품을 만들면 안 된다는 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총 세 번, 93년, 95년, 98년에 잡혀갔었는데 고문은 안 당했지만 하루에 10시간씩 취조하고 이러니 피곤하고 나중에는 심적으로 약해지더라. 물론 나보다 몇십 배, 몇백 배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당한 선생님들 앞에서 이걸 피곤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간첩이 되고 체포되고 전향 당하고 고문 당하고 끝내 고향은 못 가는 기구한 운명이다. 그들의 기구함에 비하면 나의 억울함은 언급하기조차 부끄럽다.
그래도 그땐 겁이 나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평소의 나는 정말 겁이 많은 사람인데 그 이후에 겁이 없어지더라. 한편으로는 좋았다.(웃음)
Q. 1차 송환에서 제외되어 아직 북에 돌아가지 못한 장기수분들의 연세는 이제 평균 아흔을 넘겼다. 장기수들이 잃어버린 세월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아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중요 키워드는 '희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이 양날의 검이라는 것은 알지만 희망이 있기에 그들이 이때까지 삶을 버티고, 아직도 웃고, 누군가와 연대하는 법을 배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1편 '송환'에서 비슷한 자문을 하면서 스스로 내린 결론이 있다. 어떻게 고문을 이겨냈을까,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을까, 사실 그런 직접 물어보기에 힘든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어떤 분들은 "신념의 힘이다"라는 식의 대답을 하신다. 그런데 나는 잘 믿기지가 않는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사람들한테 고문을 받다 보면 그 사람들이 계속 한심해 보일 때가 있다고 하더라. '수준 낮은 애들이 나를 때리는데 그런 놈들에게 내가 질 수 없다', '죽으면 죽었지 너네한테 무릎은 안 꿇는다'라는 인간적인 오기가 생긴다고 하더라. 고문을 받으면 고비가 오는데 그 고비에 꺾이면 자포자기하는 것이고 고비를 넘기면 살아남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는 힘은 이성적인 힘이 아니라 부글부글 끓는 분노의 감정이라고 하더라. 그런 설명을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되더라.
Q. 이 작품을 완성한 감독이 생각하는 희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인간성,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의지. 그것이 희망이라는 단어와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희망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만들 수밖에 없다. 희망이 없다고 하면 자신이 안 만들었으니 없는 것이다. 장기수들에게는 '송환은 좌절됐더라도 통일은 될 거야'라는 더 큰 희망이 생겼다. 그런 희망이 이들의 삶에 있어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이 작품을 통해, 선생님들의 모습을 통해 실패했더라도 완전한 실패는 아니라는 것을 웅변하고 싶었다. 통일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버티는 의지, 사람이 살게 하는 이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느껴주셨으면 (시험에서) 백 점을 맞는 느낌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