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배우와 관련해서는 다들 정우성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안겨준 영화 ‘태양은 없다’(99)를 이야기하지만 그가 전국적 인지도를 쌓은 것은 SBS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서의 백재희 역이다. 이후 이정재는 한국 대중연예계의 스타 중의 스타가 된다. ‘관상’ 전에, ‘오징어 게임’ 훨씬 전에 말이다. 그런 이정재가 감독으로 데뷔한다. 원래는 제작만 하려고 했다가, 감독을 만나지 못해 본인이 직접 등판한 것이다. 오늘(10일) 개봉하는 ‘헌트’이다. ‘헌트’는 안기부 내에 암약하는 스파이를 색출하려는 요원 ‘박평호(이정재 분)’와 ‘김정도(정우성 분)’의 아슬아슬한 대결을 담고 있다. 배경은 1983년 정도. 광주부터 시작하여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 곳곳에 스며있다. 이정재 감독을 만나 영화감독 되기에 대해 들어보았다.
Q. 칸느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현장 반응은 어땠나.
▷ 이정재: “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쉽게 이해하고, 재밌게 본다면 외국 관객들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쓸 때 최대한 쉽게 쓰려고 했다. 그런데 칸에서 공개되었을 때, 셋 중 한 사람은 전혀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더라. 그래도 반 정도는 꽤 재밌게 보신 것 같고. 그 정도면 한국관객도 따라 가기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각색을 시작했다. 한 1주일 정도 시간이 있으니, 다시 촬영할 수는 없어도 편집을 조금 할 수 있었다. 입술이 크게 안 보이는 컷을 이용해서 대사를 수정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가능할까 걱정이 되었다. 무리수가 있더라도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 작업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Q. 수정된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인지 말해 줄 수 있나.
▷ 이정재: “영화 초반에 한국의 시대 상황을 알려준다거나, 안기부 내에서 벌어지는 해서는 안 될 장면들, 그리고 몇몇 대사들. 전체적 구조에서 보자면 두 인물의 대립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빼는 것이 영화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전체적 시대배경을 말하는 부분, 안기부의 악행을 묘사하는 부분을 조금씩 걷어냈다. 러닝타임으로 따지자면 2분 조금 넘게, 3분이 채 안 된다.”
Q. 그럼, 칸 가기 전에 그런 편집작업을 할 여유가 없었는가? 내부시사 등을 통해서 말이다.
▷ 이정재: “그게 보통 내부인들이 생각하는 오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재미있지, 흥미 있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마 이 정도는 아시겠지 했는데, 그게 저희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인 것 같다. 다행히 편집을 통해 많은 부분들이 해결된 것 같다. 2분이라면 꽤 많은 장면 같은데, 보통 한 씬이 1분이다. 여기서 10초, 저기서 20초, 또 3초, 이런 식으로 들어냈다. 잘못 생각한 것을, 오류를 늦게라도 수정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Q. 시나리오 작업에만 4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 이정재: “짧은 이메일만 쓸 줄 알았지 내가 워드를 쓸 일은 없었다. 줄맞춤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시나리오를 직접 써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노트북을 들고 다녔다. 촬영장으로 이동할 때 작업을 했다. 연기자들은 작품을 찍다가 시간이 나면 게임을 하거나, 전화를 하거나, 영화를 본다. 난 조금씩 글을 썼다. 클라우드에 올렸다가 다 날려버리기도 하고. 두 달 동안 쓴 것을 날린 적도 있다. 패드와 노트북, 핸드폰을 연동해 가며 작업했다. 메모장에 기사 스크랩도 연동시키고. 그 4년 동안 일곱 작품을 했더라. [대립군] 때부터 [오징어 게임]까지. 물론 잘 안 풀릴 때가 훨씬 많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게 대부분이었다. 메모하고, 수정하고, 글 쓰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 것이다.”
Q. 한국의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들이 영화에 녹아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데 대한 부담은 없었는지.
▷ 이정재: “저 자신도 두려웠던 부분이다. 그래서 순수 ‘스파이 장르’로만 쓰려고도 했었다. 80년대가 배경이 아닌 현재 버전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기본 축은 정도(정우성)와 평호(이정재)라는 두 인물이 잘못된 신념으로, 다른 목적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수정을 거듭하다가 80년대로 다시 시대 배경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 사건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보다는 모티브로만 삼았다. 그 인물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상상력을 조금 가미하면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있지 않을까. 과감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나쁜 의도로 괜한 상상력을 사용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면 배우 생활에도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Q. 워싱턴의 한인 시위는 전두환 집권 초기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 이정재: “당시 대통령의 미국 순방 때에 각 도시에서 한인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그 뉴스를 찾아보면서 그런 사건을 영화에 담으면 ‘정도’ 입장에선 꼭 필요한, 중요한 모티브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모티브로 캐릭터를 이끌어갔다. 뭔가 좀 더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Q. 미얀마(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은 ‘태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물론, 이야기는 많이 달라지지만 그게 어떤 사건을 모티브로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 이정재: “원래 처음 ‘남산’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 판권을 획득했을 때부터 그 부분은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웅산 사건은 어마어마한 사건이고, 피해자가 많고, 유족들이 계시다. 저것을 재현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프로듀싱만 할 생각이었다. 각색 과정에서 그 장면을 태국으로 바꾸었다. 폭발이 있기 전에 버스로 이동하는 장면. 버스 안에서 내빈들이 보이고 바깥을 보여주는 쇼트가 중요했다. 폭발 이후에 대통령이 탄 차가 빠져나가는 장면도. 그 쇼트가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는 쿠엔티 티란티노의 [바스터즈]에서 얻었다. 그런 식으로 찍어도 관객들이 받아주시는구나. 그래서 우리 관객들도 이런 이야기를 이해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Q.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롭다. 많은 감독들이 관심을 가졌을 것 같은데. 왜 이정재 배우가 감독까지 떠맡게 되었을까.
▷ 이정재: “아무도 안 해 주시더라. 감독님 많이 만났는데 다들 어렵겠다 하시더라. 다양한 핑계와 이유를 대시더라. 저도 잘 알죠. 어렵겠다는 것을. 스파이 장르물인데 ‘남산’ 초고에는 액션이 많지 않았다. 무드가 있는 스파이영화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선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 본 것이다. 액션을 많이 넣어야한다고 말하더라. 그러면 제작비가 많이 들어갈 텐데. 제작비 투자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잘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시나리오로 봤을 때 완성도 있게 뽑는 게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Q. 감독데뷔작이 대작이다. 제작비에 대한 압박감, 흥행에 대한 부담감이 클 것 같다.
▷ 이정재: “연기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내가 연출과 제작을 맡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제작비는 들어가는 만큼 관객들이 들어와 줘야 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와 어떤 캐릭터로, 어떤 볼거리가 있어야할지 고민을 했다. 전체적으로 잘 어우러져 재미있게 보여준다면 투자사나 스태프, 배우들이 참여하지 않을까.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가 공동제작으로 참여하면서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Q. 작품에 대한 자신이 있었나 보다. 제작비를 줄여서 해볼 생각도 해봤는지.
▷ 이정재: “서스펜스만 있는 영화를 관객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스스로 의문이 있었다. 서스펜스와 함께 풍부한 볼거리가 있다면 더 많은 관객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제작비를 줄이는 것보다는 최대한으로 제작비를 확보하여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30년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예전에 액션을 했을 때를 떠올리며 서스펜스를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풀 세팅을 하지 않아도, 부분적인 연출만으로 비용절감을 할 수 있고, 그 절감된 비용을 다른 데 투자해서 더 강력하게 찍을 수 있다. 오랜 현장 경험에서 얻은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Q. 배우가 감독을 해보니 달랐던 것은.
▷ 이정재: “많죠. 연기자일 때는 연기 현장밖에 몰랐다. 그런데 프리 프로덕션을 5개월이나 했다. 그걸 경험해보지 못했었고, 다 찍은 뒤에도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이 이렇게 길 줄이야. 사운드믹싱, 음악, 편집, CG, 색 보정 등등. 아, 현장에서 찍는 것은 정말 반도 안 되구나. 음식재료만 챙기는, 장보기였다는 생각이 들더라.”
Q.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할 때 어려웠던 점은.
▷ 이정재: “시나리오를 오래 붙잡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생각에는 평호의 생각과 감정도 있다. 현장에서는 육체적으로 힘들기 했지만 연기적으로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물론 연출만 하고 연기를 안했다면 더 꼼꼼히 보며, 더 잘했을 것 같기는 하다. 어떻게 보면 연출과 연기를 같이 할 때는 결정을 빨리 내릴 수 있는 것 같다.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목표, 온도, 습도에 대해 연출가는 다 알고 있으니.”
Q. 감독을 하고 싶었던 생각은 원래부터, 아예 없었던 것인가.
▷ 이정재: “(정)우성 씨는 20대 때부터 시나리오를 썼었다. 옆에서 보고 듣고 그랬다. 하지만 저는 ‘1’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감독들 대부분이 시나리오를 쓴다. 그래서 연출을 하려면 시나리오를 꼭 써야 된다고 생각했고,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했었다. 많은 감독들이 난색을 표했기에 내가 직접 조금씩 쓰게 된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퍼즐 맞추기, 낱말 맞추기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첫 번째 완고가 나오고 나서는 이제 게임이 아니라 본격적인 시나리오를 써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 되었다.”
Q. 정우성과의 작업에 대해.
▷ 이정재: “‘태양은 없다’ 이후 ‘우리 빨리, 같이 작품 하나 합시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실제 할 뻔 한 작품이 몇 개 있었다. 끝내 성사되지 못하고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 정말이지 ‘태양은 없다’이후 10년 안에 하나는 할 줄 알았다. 역시 작품은 운명적인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다.”
Q. 감독으로서 함께 한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 이정재: “연기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상대방의 출연작 중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연기를 눈여겨보게 된다. 전혜진과 허성태는 의외였다. 전혜진 씨는 사람이 진솔하고 예술 분야에 다양하게 관심이 많아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촬영 끝난 후에도 동료애, 유대감, 친근감이 있다. 허성태는 남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수줍음이 많고 상대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한다. ‘오징어게임’이후 현장에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기 캐릭터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모습이 놀라왔다. 우성씨는 (태양의 없다 이후) 23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두세 편은 더 해야 하는데...”
Q. ‘오징어 게임’이 호평을 받았고, ‘헌트’가 시사회 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에미상 후보에도 올랐다. 정말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은 것인가.
▷ 이정재: “그게 참. 저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 같다. [관상] 때만 해도 나에게 ‘제2의 전성기’가 오는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 [관상] 이후 작품들이 다 잘 되었다. 제2의 전성기가 온다는 것은 쉽지 않다. [관상] 이후 너무 많은 사랑을 얻는 것 같다. 고마울 따름이다. 외국에서 길을 걷다보면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신다. ‘오징어게임2’ 언제 나오냐고 물어본다.”
Q. 감독을 계속 할 것인지.
▷ 이정재: “감독 차기작은... 지금으로썬 ‘제발 기다려주세요’이다. 연기를 더 하고 싶다. 연출을 의뢰받아서 하는 것은, 하고 싶은 소재나 이야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Q. 해외 진출 계획은 어떻게 되나.
▷ 이정재: “에이전시를 통해 출연 제안은 들어오고 있다. 줌으로 미팅을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에서 잘 찍어서 해외에 나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징어게임]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쉬운 방법은 아니다.”
“제가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책임감이다. 또 하나는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항상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저의 행동과 속마음이 바르지가 않았다면 일단 캐스팅이 안 될 것이다. ‘저 사람 책임감 없다’, ‘연기에 대해 충분히 준비를 해오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면 캐스팅이 안 된다. ‘책임감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켰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든 드라마든 일 하는 게 재밌다.”
일하는 게 재밌다는, 연기도, 연출도, 제작도, 시나리오도 재밌다는 이정재 신작 [헌트]는 오늘(10일) 개봉한다.
2022년 7월 27일 '헌트' 시사회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