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에서 나쁜 일본군을 맡았었는데, 김한민 감독님이 시사회에 오셨다. 나에게 ‘한산’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 역할을 맡기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시나리오를 보고는 이렇게 큰 인물을 내가 한다고? 너무 큰 존재라고 느껴져서 걱정이 되었었다.”
‘범죄도시’의 장이수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의 순댓국밥집 정인권을 연기한 배우 박지환은 연극배우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류승완 감독의 액션영화 [짝패]로 영화에 데뷔했다. 본인 말로는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그 후 수많은 영화에서 단역을 맡으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악역’으로 기억된다. 마동석의 ‘성난 황소’와 ‘범죄도시’의 장이수를 맡으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그의 최신작은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이다. 박지환은 이번 작품에서 조선의 운명이 달린 해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거북선을 설계한 장수 나대용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최근 인지도와 인기를 증명하듯 광고계 러브콜이 쏟아지는 박지환을 만나 '나대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박지환: “영화 ‘봉오동전투’ 시사회 끝난 뒤 한번 만나자고 하시더라. (일본군 시게루 중위를 연기했다) 난 또 왜군 역할을 맡기시려나 생각했는데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 역할이라고 했다. 속으로 ‘그걸 왜 저한테?’ 이상한 분이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후에 시나리오가 왔다. ‘와~’했다. 분량이나 인물에 대한 게 아니라 너무 큰 존재로 느껴져서 걱정도 많이 했다. 제가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인가 걱정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란 존재가 나대용이라는 인물에 비해 갈수록 작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과장되고, 화려하게 생각했던 것이 다음날엔 조그마해지는 것이다.”
Q. 나대용 장군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
▷박지환: “나대용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사료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했다. 찾아보니 과학의 날인 4월21일에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하더라. 그래서 급하게 차에 짐을 싣고 그곳으로 떠났다. 오디션 때까지는 안 들어온다는 생각으로. 마치 ‘문화유산답사기’처럼. 나주에 가가면 소충사(召忠祠)가 있다. 그곳에서 아침부터 기다렸다. 마음은 진심인데 이게 생각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후손님께 인사드리는데 무슨 일로 오셨냐고 하셨다. 그래서 사실 배우인데 ‘한산’이란 영화에서 나대용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제 손을 꽉 잡으려 열심히 잘 부탁드린다 이 말씀만 해주시더라. 책도 주셨는데 이미 읽은 책이더라. 나대용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선 뭔가 진심이어야 할 것 같았다. 꿈에라도 나타나 주시기를 바랐다.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었다. 여수, 고흥, 순천, 진주, 통영을 쭉 다녔다. 나대용 장군이 내 마음속에 떠오르기 전까지는 안 돌아간다고 생각했었다.”
Q. 그렇게 해서 나대용 장군이 떠올랐는지.
▷박지환: “바다를 보며 밤에 살짝 취했다. 밤바다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환영도 아니고, 머릿속에 그림처럼 전쟁하는 게 그려지는 게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소름이 돋았다. 방으로 들어가서 생각나는 것을 노트에 썼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와서는 감독님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대용’을 준비해보겠다고 그랬다. 첫 촬영을 들어갈 때 감독님과 주파수가 잘 맞았던 것 같았다. 이전 작품에서는 아이디어나 재치로 인물을 포장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절대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갈 곳을 ‘1’도 안 주고, 어떻게 하면 정면 승부할 것인가. 그 생각만 하고 나대용을 연기했다.”
Q. 자신이 맡을 역할에 흠뻑 취한 듯하다. 마치 메소드 연기를 펼칠 배우처럼.
▷박지환: “다른 작품 준비할 때는 그냥 생활하듯이 툭툭 감정을 던져 연기를 했다. 캐릭터를 분석하는 편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집중해서 두 번 정도 읽고는 머릿속에 딱 들어서게 한다. 그리고는 공기에 흐름을 싣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볼 때 마다 나 자신이 요만큼씩 작아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장군님 찾아가서 예를 갖추자, 나의 마음을 보여주자 생각했다. 그러면 나의 장군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Q. 이순신을 연기한 박해일 배우는 인터뷰에서 박지환 배우에 대해 ‘미학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
▷박지환: “첫 촬영 때 생각이 난다. 박해일 선배의 눈이 이상하게 보였다. 대사를 주고받는데 연인도 아니면서도 엄청나게 가슴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너무 좋았다. 그런 연기의 순간은 약속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감독님 사무실에서 감독님과 박해일 선배랑 처음 만나 대본을 읽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죽은 악령이 다 덤벼들어도 조선 수군을 못 이겼을 것 같다고. 내가 느낀 그들의 마음이었다. 조선의 장수와 수군들이 한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런 마음들이 영화 마지막에 나온다. 죽을 수도 있지만 이겨야하는 전투인 것이다. 연기를 하면 내내 그런 생각이었는데 선배님이 그런 면을 봐주신 것 같다.”
Q. 장이수에서 나대용으로 변신한 것에 대해 놀랐다는 반응도 있다. 작품을 끝내면 그 역할에서 쉽게 벗어나는지.
▷박지환: “작품이 끝나면 굿바이하고 흘러가는 대로 두는 편이다. 이런 이야기로 대신하고 싶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금강산을 보고 북한산을 오르면, 금강산이 그립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북한산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금강산이 좋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설악산이 좋다고 말할 수도 있고. 관객들이 좋은 느낌을 가지셨다면 감사하게 생각한다.”
Q. 촬영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박지환: “왜군이 거북선의 설계도를 훔쳐가고, 이순신 장군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중요한 씬이라서 아침부터 긴장되어 손이 다 떨렸다. 하지만 내 눈에서 그런 결기 같은 게 넘쳐난 모양이다. 박해일 선배가 내 눈을 보고는 ‘감독님, 잠깐만요. 지환이부터 하죠’라며 ‘너 순서부터, 지금 해야 될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카메라 세팅을 다시 하고, 저 장면부터 먼저 찍었다.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그 장면 찍고 나서 감독님이 안 보이시는데 세트 한 쪽에서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 아마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아마도, 장군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끼신 것 같았다. 찡하죠. 그런 순간은.“
Q. 감독님이 그만큼 감정이 격했던 모양이다. 이순신 하면 어쩔 수 없이 ‘국뽕’의 감정이 뒤따른다.
▷박지환: “저도 촬영하면서, 영화 끝나고 부끄러웠다. 제가 너무 작다는 사실이. 그 인물에 비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영화는 여운이 길다. 그동안 많은 연예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의 위상을 세웠다. ‘한산’에 나온 인물들은 구국의 영웅이시다. ‘국뽕’이라고 하더라도 왜 그러면 안 되겠나. 평소에 이분들을 충분히 기리지 못한 면이 있다. ‘명량’때도 그랬다. 이순신을 평소 잊고 지내다가 금세 잊어버린다. ‘국뽕’보다 더한 것이더라도 필요할 ㄱ서이다. ‘이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한산’에서 패전한 와카자카 야스하루의 후손들은 그 때의 패배를 잊지 않도록 매년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날에는 미역을 먹는다고 하더라. 우리는 어떤가. 나 스스로 반성해야겠다.”
(영화 ‘한산’에서 와카자카 야스하루(변요한)는 이순신이 쏜 화살에 맞아 바다에 떨어진다. 사서에는 와카자카가 무인도로 헤엄쳐 가서는 그곳에서 한동안 미역만 뜯어먹으며 숨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여 일본에서 승승장구한다.)
Q.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 영화를 3편 만든다. 현장에서 이순신을 향한 김한민 감독의 감정이 느껴지던가.
▷박지환: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이순신 장군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순신을 알려고 하고, 그것을 세상을 알리려는 분이다. 감독님 사무실, 방에 들어가면 사무실 같지가 않다. 무슨 사당 같다. 영혼을 느낄 것 같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 마음이 느껴졌다. 감독님은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거두절미하고 직진한다. 영화를 보면 이상한 게 없잖은가. ‘한산’을 촬영하면서 감독님과 주파수를 맞춰서 해야 한다. 살짝 도깨비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정말 이순신 장군이 씌었구나. 한 인물에 오랫동안 접근했으니 그 에너지 몸에 채워져 있는 것 같다. 멋있고 좋았다.”
Q. 김한민 감독은 나대용이란 인물에 대해 거북선 외전이라도 만들고 싶을 정도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박지환: “그래요? 금시초문이다. 내가 거북선 안에서 연기하며 느낀 것이 많다. 격군이 노를 젓고, 수군들이 사력을 다해 화포를 쏜다. (나대용) 장군님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배에 탄 것이었다. ‘한 배를 탄다’는 의미를 정말 알겠더라. 전쟁이 시작되고, 진을 완성하면 거북선을 그 중간을 뚫고 지나가야한다. 나대용뿐만 아니라 그 안에 탄 모든 배우들이 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다들 목숨을 바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배에 탄 사람들은 한 마음이었던 것은 맞다. 1592년이나, 지금의 영화에서나.”
Q. 블루매트, 크로마키 촬영을 한 소감은 어땠는지.
▷박지환: “이보다 앞서 ‘해적2’ 찍을 때는 블루스크린 앞에서 연기할 때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한산’할 때는 눈에 다 보이는 것 같더라. 서울에서 찍더라도, 미국에 가서 찍더라도 ‘여기가 여수다’ 하면 여수라는 감정이 생기더라. 한적한 곳에서 그렇게 찍으니 집중하는 힘이 생긴다. 이 영화에서 CG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느낄 수 있다.”
Q. ‘한산’의 촬영은 거의 대부분 강릉 아이스경기장에서 찍었다는데.
▷박지환: “내가 하는 역할은 대부분 여수에서 찍었다. 돌격하는 장면을 블루 스크린으로 다 찍었다. 배끼리 부딪치는 충파(衝破)는 CG로 구현되었다. 촬영장에서의 분위기는 엄청 뜨거웠다. 하지만 거북선 안에서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차갑게, 써늘하게. 그 모든 것이 한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엄청 조용해지고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Q. 김한민 감독의 ‘노량’이나, 다른 이야기에서 나대용 연기를 계속 할 생각이 있는지.
▷박지환: “드라마가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나대용을 다시 연기할 생각은 없다. ‘한산’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나대용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보다 좀 더 뛰어난 배우가 나대용을 맡아, 좀 더 해석하고, 좀 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제가 나대용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에는 너무나 작다는 것을 잘 안다. 좀 더 크고 넓은 마음의 연기자가 또 다른 나대용을 연기하는 것을 보고 싶다.”
Q.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지금 찍고 있다는 드라마는 어떤 작품인가.
▷박지환: “지금 찍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말라네요. 그리고 그것 말고 차기작으로 정해진 것은 아직 없습니다.”
지난 7월 27일 개봉된 김한민 감독의 [한산:용의 출현]은 어제(8/7)까지 459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