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객이 든 영화는 김한민 감독의 [명량](2014)이다. 1597년 12척의 배로 ‘명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격파한 구국의 영웅, 민족의 별 이순신 장군을 담은 이 영화는 1760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번엔 시계침은 앞으로 돌려 1592년의 조선이다. ‘한산:용의 출현’에서 거북선과 함께 왜군을 무찌르는 이순신을 박해일이 연기한다. 좀 더 젊어진 이순신을 만나 고뇌하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박해일 배우는 촬영 현장에서의 소소한 기쁨부터 이야기했다.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에겐 그날 찍어야하는 분량이 담긴 A4 크기의 콘티 북이 있는데 매일 촬영이 끝나면 한 장씩 떼는 재미가 있다. 현장엔 또 칠판이 있는데 다 찍은 테이크를 빨간색 사인펜으로 X표시 하면서 지워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재미는 꼭 있어야한다.”
Q. 이번에 맡은 이순신 장군은 대사도 별로 없고, 전체적으로 과묵하다.
▷박해일: “이순신 장군의 연기 톤을 어떻게 할지 감독님과 의논하며 만들어갔다. 절제하는 방식의 캐릭터를 구축하기로 했다. 인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말을 많이 하기도 하고, 화를 내며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품에 따라 달랐는데 이번 ‘한산’에서의 톤은 최대한 절제하며, 주어진 대사가 적더라도 그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최대한 기를 실어보는 것이었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연기를 안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얼굴 한 번 비치는 몇 초 안에 드라마를 담은 감정을 눈빛으로 표현해내야 했다. 때로는 서 있는 자세 하나만으로도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Q. 전편 [명량]의 흥행 성공이 큰 부담이 되었을 것 같다.
▷박해일: “초반에는 피부로 느꼈었다. 그런데 촬영을 하면 할수록 부담감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명량]의 스태프가 거의 대부분 [한산]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 팀은 또 고스란히 [노량]으로 이어졌다. 한 인물의 이야기이지만 해전에 따라 그 결이 다르다. 최민식 선배가 해내신 결과물이 큰 부담이었지만 [한산]을 촬영할 때는 그만큼 기술적인 측면과 현장의 환경이 효율적으로 나아졌다. 최민식 선배만 하더라도 그 때는 실제로 바다에 배를 띄웠다. 한번 촬영 들어가면 계속 찍어야했다. 돌아오기가 너무 어렵고, 물리적인 제약이 많았다. 혼자 있고 싶을 때도 그러질 못했으니 스트레스도 많았을 것이다. 흔들리는 물 위에서 카메라 앵글 잡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한산]은 더 좋은 환경에서 찍을 수 있었으니 더 좋은 결과물이 나와야 할 것이다.”
Q. 이순신 역할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다는데.
▷박해일: “나뿐만 아니라 많이들 의외의 캐스팅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김한민 감독과는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이다. 감독님의 데뷔작인 [극락도 살인사건](2006)과 [최종병기 활](2011)에 이어 이번에 다시 함께 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같이 작업하면서 사적 만남도 있었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기질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촬영을 하면서 더 많은 의지가 되었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이라는 캐릭터를 만드는데 배우와의 기질을 잘 매치시켜주려고 노력하셨다.”
Q. 완성된 작품을 보고난 소감은.
▷박해일: “한 번에 다 들어오지 않더라. 작품을 할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제가 연기한 것에는 민망한 점도 있다. [한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후반적업으로 완성시킨 압도적인 전투 장면이다. 엔딩타이틀 올라갈 때 수많은 스태프를 보았을 것이다. 많은 예산과 오랜 시간 공들인 작품이다. [한산]은 그런 대작의 특성을 잘 보여준 것 같다. 또한 함께한 배우들의 노력이 있었다. 안성기 선배, 변요한 배우, 지금 군대 가 있는 공명 씨, 진짜 많은 배우가 고생했다. 조선수군, 의병, 왜군 역할을 한 배우들도. 처참하게 전사하는 연기를 한 단역배우까지도. 이상하게 이번 영화는 모두들 어떤 소명의식을 갖고 참여한 것 같다. 코로나가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고 수백 명의 스태프와 수백 명의 배우들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 시사회 때 촬영 현장 생각이 많이 나더라.”
Q. 시사 이후 평가가 좋은 것 같다.
▷박해일: “영화 홍보팀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산] 시사회 때 많은 배우들이 같이 앉아서 봤다. 보고나서 ‘이거 우리가 촬영한 것 맞아?’하며 다들 놀랐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관객들이 만족하는 게 우선이다. 지금은 조심스럽다.”
■ 이순신과 거북선, 한국 사람이라면 느끼는 한(恨)
Q. 이 영화에서는 ‘거북선’이 대활약을 펼친다. 거북선을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박해일: “비록 모형이지만 바다에 띄우면 뜰 것 같았다. 단단한 목재로 만들어서 뛰어다녀도 될 만큼 튼튼했다. 진짜 전투를 해도 될 것 같았다. 거북선이라면 그 용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나왔던 거북선들과 비교해 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조금씩 다르다. [명량]때와도 다르다. 사실은 이게 한국 사람이라면 더 느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상징적인 측면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한이 좀 서려있는 것 같았다. 조선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느낌? 짠한 느낌이었다. 제2의 주인공이다. 그 거북선을 설계한 나대용을 박지환 배우가 연기한다. 같이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관계이다. 촬영할 때도 서로 ‘욱’하는 격정적인 장면을 보였다. 이 정도까지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박지환 배우가 울분을 토하며 눈물을 보이는 연기를 한다. 지환 씨는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멋진 연기를 해주셨다. 보아온 작품 속 이미지와는 너무 달라 놀랐다. 이 사람이 미학적이더라. 배우로서 보여줄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 “양반다리로 앉아, 수양을 쌓아보자”
Q. 현장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박해일: “‘헤어질 결심’때도 ‘한산’ 때도 코로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파이팅’을 도모하는 회식도 없었다. 숙소 생활도 꽤 오래한 작품이다. 숙소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꽤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료들이 서로 배려를 많이 했었다. 모두가 다른 영화에서보다는 좀 더 진중하고, 절제된 배우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저 같은 경우는 숙소에서 시나리오 볼 때도 양반다리를 했었다. 의자에 앉기보다는 바닥에 더 많이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수양을 한 번 쌓아보자’ 이런 태도였던 것 같다.
Q. 김한민 감독은 시간이 되면 틈틈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었다는데.
▷박해일: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볼 수 있을 만큼 봤다. 숙소에는 관련 책들이 구비가 되어있었는데 촬영 때는 그렇게 많이 보지 않았다. 콘티와 시나리오를 더 많이 봤다. 잡념이 생기면 촬영장 근처를 많이 걸었다. 그 분(이순신)이 그런 식으로 화를 풀었듯이 조용히 많이 걸었다. 활을 쏠 수는 없으니. 강릉에 있을 때도, 여수에 있을 때도 많이 걸었다. 잡념들을 많이 제거하려고 했다.”
Q. 이순신을 연기하면 특히 어려웠던 점은.
▷박해일: “이순신의 고뇌를 팽팽한 에너지가 넘치는 전투신에서는 보여줄 수가 없다. 영화 초중반에 학익진을 한산전투에서는 써야겠다고 결정하는 장면, 녹둔도의 꿈을 꾸는 장면, 초소에 혼자 앉아서 진법을 구상하고 결정할 때 보이는 눈빛 연기, 혼자 활을 쏘는 장면, 주위에서 수성이냐 공성이냐 물어볼 때 가지는 인간적인 고민들. 그런 장면에서조차 많이 보여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전투를 준비하고 전투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주어진 짧은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고민, 인간적인 고뇌를 담아내려 노력했다. 그런 장면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후 전투와 맥이 안 닿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Q. 이순신을 연기해 보니 그 사람은 어떤 리더였다고 생각하는지.
▷박해일: “흠결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만큼 배우로서, 자연인 박해일로서 간격이 컸다. 그래서 그분을 연기하는 것은 뭔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흠결 자체인 제가 그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리더의 자격은 무엇일까. [명량]에서는 리더로서의 톤이 명확하고 명분이 있는 것 같다. [한산]에서 보여준 이순신은 조금 다르다. 수군들에게 기운을 북돋워준다. 각자의 역할을 명확하게 하고 자신은 한 발자국 뒤로 떨어져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은 [한산]에서의 이순신일 듯하다. 작품의 결도 첩보전, 정보전이다. 이 시대에 어울린다. ‘지피지기’ 이런 지점에서 보아도 말이다.”
“이 작품이 왜 지금 나와야했을까. 사실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너무 익숙해져서 못 느낄 뿐이다. 언제나 전쟁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관객에게 위기감을 심어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앞으로 [노량]도 개봉되겠지만 이순신 장군처럼 전 국민이 아는 역사적 이야기는 계속 나올 것 같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Q. ‘헤어질 결심’과 ‘한산’이 같은 시기에 개봉된다. 제2의 전성기인가.
▷박해일: “사실, 박찬욱 감독, 김한민 감독, 그리고 아직 선보이지 못한 임상수 감독님의 작품(행복의 나라로)까지 세 작품을 코로나 시기에 찍었다. 그 결은 다르지만 대단한 개성을 가진 감독님과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저에겐 진기한 경험이었다. 온전히 관객들이 즐기셨으면 좋겠다.”
Q.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김한민 감독의 [한산]이 같이 개봉되어 우려스럽지 않은지.
▷박해일: “그런 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개봉하는 것이니. 코로나 지나가면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작품들이 한데 뭉쳐서 나오는 느낌이 든다. 재밌는 부분도 있다. [헤어질 결심]에서 내가 연기한 해준은 해군 출신이다. 송서래가 재울 때 그런 말을 한다. 두 작품 모두 바다에서 엔딩을 맞는다. 문학적인 말투를 쓴다. 장군님은 시를 쓰기도 하잖아요. 바다 위에서 전투를 펼치고. 해군이고, 둘 다 공무원이다. 재밌는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Q. 왜군 수장을 맡은 변요한과는 소통을 어떻게 했는지.
▷박해일: “제가 캐스팅되고 얼마 뒤 변요한씨가 캐스팅 되었다. 요한씨가 저한테 문자를 보내주더라. 그때가 밤이었는데 서로 다른 곳에서 맥주를 하고 있었다. 요한씨가 포효하는 듯한 모습의 셀카 사진과 함께 ‘한산 파이팅’이라고 보내왔는데, 나도 조금 취기가 돈 모습을 보냈었다. 그게 이 작품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인 듯하다. 촬영장 상황은 좀 달랐다. ‘조선 수군’ 촬영을 끝내고 빠져나가야, ‘일본 수군’ 장면을 찍을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니 서로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오다가다 만날 기회가 생기면 서로 회집에서 만났다. 같은 수군이니. 요한씨는 회집에 일본어 선생님 대동하고 와서는 일본어 외워가며 그랬다. 그 자리에서 서로 컨디션 체크하고 상대 진영 분위기 물어보고 그랬다. 저는 김한민 감독과 작업해 본적이 있어서 소통하는 문제, 캐릭터에 대한 고민들을 서로 밤새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런 시간이 너무 좋았다. 각자 역할 때문이라도 서로 배려해주고 존중해주었다. 서로 고생하는 거 잘 아니까. 짧은 만남이지만 그 자리에서 서로 힘을 실어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장문의 문자를 주고받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Q. CG작업을 위해 크로마키, 블루스크린 작업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박해일: “처음엔 난감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때는 하나의 크리처를 두고 연기에 집중하면 되었다. 이번 촬영에서는 전방위적으로 상황을 인지해야한다. 물살의 흐름도, 적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늠도 해야 하고, 우리가 수세인지, 공세를 언제 펼쳐야할지 판단하고 그 기운을 연기해야했다. 강릉 스케이트장에 가면 조선의 판옥선과 왜군의 안택선(안타케부네), 그리고 거북선 등이 있고 사방에 그린맨트가 둘러쳐져있다. 어찌 보면 연극에서 최소한의 무대세트로 연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 것은 CG팀과 감독이 만든 애니메틱 스토리보드였다. 동영상콘티를 보고 지금 어떤 상황이고, 배우가 어디를 바라봐야하는지, 어떤 감정과 연기를 해야 하는지 합을 맞췄다. 정교한 후반 CG작업을 위해 배우들이 합을 맞추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배우의 감정과 CG가 따로 놀지 않기를 바랐다.”
Q. 한국인이라며 누구나 다 아는 이순신 장군을 연기하며 가장 경계한 것이 있다면.
▷박해일: “제가 배우로서 잘 못하는 게 감정과잉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감정을 너무 드러내놓는 것을 경계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내 안에서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것을 절제된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촬영장에서는 감독님께 제 연기에서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자주 물어본 것 같다.”
“생각한대로 연기가 잘 담겨지길 바라고 노력했지만 ‘완벽하게 해냈다’라는 말을 못하겠다. 많은 스태프, 상대 배우들, 그리고 음악, 편집, 배경, CG 등등 효과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이순신이라는 캐릭터를 표출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이번 작품을 함께한 배우들의 캐릭터가 생생했기에 이순신이 드러나는 방식의 연기가 나왔다는 것도 맞는 것 같다.“
Q. [명량]은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 [한산]의 흥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는지.
▷박해일: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다. 제가 지금 인터뷰하는 이 순간에도 제가 연기한 이순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 관객이 어느 정도 들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할 입장도 안 되는 것 같고. 올해 극장가는 이색적이다. 1주일 단위로 대작들이 관객들에게 선을 보인다. 예전처럼 극장에서 편하게, 다양한 색깔의 작품들을 즐기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 천만 넘는 걸로?)
▷박해일: “조심스럽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이야기는 3부작으로 완성된다. 최민식의 [명량], 박해일의 [한산:용의 출현], 그리고 [노량:죽음의 바다]에서의 김윤석이다. 올해 ‘헤어질 결심’에서 유리같이 예민한 형사를 연기랬던 박해일이 과연 어떤 고뇌의 장수를 연기했는지는 7월 27일 개봉하는 [한산]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