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뒤 지난 달 개봉한 신수원 감독의 영화 [오마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두어 편의 영화를 만들고는 ‘현실의 벽’에 마주선 극중 ‘여성’ 영화감독(이정은)이 흑백필름 ‘여판사’의 복원을 둘러싸고 1960년대 충무로에서 활동했던 ‘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감독’ 홍은원의 이야기와 접점을 찾아간다. 이 영화에는 충무로 원로배우를 유순철 배우가 등장한다. 1960년대 영화판에서 활약하던 ‘스칠맨’(스틸 맨)이자 당시 영화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명동의 오래된 ‘다방’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올해 85세의 유순철 배우는 그 시절의 충무로를 기억하는 배우이다. 무려 ‘김기영 감독’과 ‘신상옥 감독’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이다. 원로배우 유순철을 만나 그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김기영 감독의 [고려장]이란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했다.
▷유순철: “‘하녀’ 등을 찍었던 김기영 감독의 [고려장](63)에 출연했다. 김진규, 이예춘, 박암, 독고성 이런 배우가 나왔다. 형제가 열이나 되는 집안에 새로 의붓아들이 들어오는데 형제들이 먹는 걸로 그 아이를 못 살게 군다. 나중에 그 아이에게 형제들이 모두 맞아죽는다. 나는 그 열 형제 중 한 역할이었다.”
Q. 김기영 감독 작품에는 어떻게 캐스팅된 것인가.
▷유순철: “픽업당한 거지. 충무로에 있는 김기영 감독 영화사 사무실에 매일 나가는 거야. 딴 감독 작품에는 출연 못하게 하신 거야. 매일 사무실로 출근해서는 난로에 연탄불 피워놓고 잡담하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이지. 가끔 촬영 있으면 가고. 단역이었어. 1년 정도 그렇게 지내다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그래서 충무로에서 명동으로 넘어갔지.”
● 출발은 영화, 그러나 연극을 하다
▷유순철: “당시 명동은 이낙훈(1936~1998), 이순재 같은 사람이 연극하던 곳이었지. 대학에서 연극하던 사람들이 졸업하고 극단을 만들어 활동했어. 허규(1934~2000), 김의경(1936~2016) 등 연극계의 거물이 된 사람들이 ‘극단 실험극장’을 만들어 연극을 했었어. 얼마 뒤 유치진이 남산에서 드라마센터 만들면서 극단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는 거야. 두 달 정도 연습하고, 5일 공연하지. 요즘처럼 한 달씩 장기 공연할 수는 없었지. 다른 극단들도 그 무대를 사용해야하니. 그때 나하고 같이 연극 공부하던 친구가 극단 단원이었어. 나도 그 친구 바람에 입단했지. 그러다가 김의경이란 친구가 미국 유학 갔다 와서는 자신의 극단을 하나 만들었지. 극단 현대극장이라고.”
Q. 연극을 할 때는 어떤 무대에 올랐나.
▷유순철: “그 무렵 ‘맹진사댁 경사’, ‘리어왕’, ‘돈키호테’ 이런 것 했어. 그러다가 김효경(1945~2015)이 연극 같이 하자고 했어. [햄릿]을 현대적으로 각색해서 하는 것인데. 난 2회 공연 때부터 무대에 올랐지. 그 사람 아파트 거실이 연습장이었고, 극단 사무실이었지. 연습할 때마다 밥을 주더군.”
“나는 햄릿의 부왕을 맡았는데. 그동안의 햄릿 부왕이라면 뿌연 안개 속에 투구 쓰고 구석에서 대사만 하는 역할이었잖아. 유령이니까. 그런데 그 틀을 깨고 분장도 하고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했어. 히트였어. [햄릿]에서 연기로 칭찬받았고, 그때부터 출연료 같은 것도 받을 수 있었지. 그전엔 연극하면서 돈을 받는 경우는 없었어. [보물섬], [한 여름 밤의 꿈] 등 이것저것 하며 돈을 받았지. 내겐 거금이었어.”
자료를 찾아보니 1977년 공연한 연극 [햄릿]에서 선왕의 유령을, [보물섬]에서 의사를 연기했다. 두 작품 다 ‘극단 현대극장’ 작품으로 김의경 제작, 김효경 연출이다.
Q. 연극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유순철: “그렇지. 하루 종일 명동 국립극장에 가 있으면 친구들이 그곳으로 오는 거야. 근처 다방에서 시간 보내다가 100원하는 국숫집을 가는 거지. 굶을 때도 있고. 고생 많이 했어. 어쩌다가 돈 받다보니 직업배우가 된 셈이지. 나이는 먹어가지. 장가도 가야지. 그때 KBS에서 특채로 탤런트를 뽑았어. 이것저것 단역을 했어. 그때마다 노역을 많이 했어. 영화는 김기영 감독이 부르면 가고, 다른 데서 섭외 오면 출연하고 그랬지.”
Q.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었나.
▷유순철: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는데 내가 살던 동네엔 극장도 없었고, 텔레비전도 없었어. 축음기 있으면 그것에 미쳤지. 어릴 때부터 동네 애들 데리고서 연극 같은 걸 했었지. 달리 구경거리도 없었으니. 그러다가 대전으로 유학간 셈이야. 대전에 오니 극장이 둘이나 있는 거야. 극장에선 하루에 영화를 한 번씩밖에 안했지. 매일 극장에 가는 거야. 다른 애들이 서부활극을 좋아할 때 나는 불란서 영화를 정말 좋아했지. 매일 봤어. 보고, 또 보고. 그래야 잠이 왔어. 공부는 뒷전이고 영화에 심취했지. 그 때 본 영화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어.”
“서울에 올라와서는 불란서문화원에 엄청 다녔지. 경복궁 근처에 있었는데 매일 가서 영화 봤어. 본 것 보고 또 보고. 명화란 것은 다 봤어. 하루에 4번 볼 때도 있었고. 당시 극장에선 ‘불이무역’이 배급하는 영화가 많았어. 그 시절 영화팬이라면 영화 시작 전에 범종을 댕댕 울리는 로고 기억할거야. 그 영화들. 당시 극장에서는 상영작을 소개하는 팸플릿을 팔았지. 그거 사서는 보고 또 봤지. 영화 줄거리와 뒷이야기 소개가 되어 있지. 영화 보고 오면 거울 보면서 주인공 표정 연습해보고, 대사 연습하고 그랬어.”
Q. 어떤 영화가 기억에 남으시나요.
▷유순철: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 불란서영화 [미녀와 야수].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장 콕토의 흑백영화이지. 앙리 조루즈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 이브 몽땅이 나왔던 작품이지. 로베르 브레송의 [무쉐뜨]. 불란서 옛날 영화가 많이 생각이 나네. 불란서문화원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야.”
“[그 섬에 가고 싶다](박광수 감독,1993), [꽃잎](장선우 감독,1996),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감독,2001)에 출연했지. 신철 대표의 신씨네 제작이사가 불란서 문화원에서 같이 영화 보던 친구 박건섭이었어. 그 친구는 불어를 잘했어. 나보고 불어 배우라고 했는데 난 못 배웠지. 그 친구가 문화원 나와서 신씨네에서 제작이사로 있을 때 일을 참 잘 했지. 박종원, 박광수, 장길수, 이황림 감독 일봐줬어. 홍콩 유위강 감독의 [데이지]때는 그 친구 덕분에 네덜란드까지 가봤지. 촬영 없는 날에 관광도 하고. 내 연기가 필요한지 아직은 배역이 들어와.”
●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2022)
▷유순철: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2014)에 출연했었지. 대전의 호텔에 묵으면서 촬영을 했어. 난 병실에 그냥 누워있는 다 죽어가는 사람이야. 자식들이 내 유산 때문에 살려두는 것이지. 그 연기가 4일간 시켰는데, 촬영 없을 때는 위층에 올라가서 쉬세요. 그러더군.”
“신수원 감독이 [오마주]를 준비하면서 날 찾았지. [오마주]는 60년대 충무로의 이면사를 다루고 있어. ‘오마주’란 말은 불어로 ‘경의’라는 뜻이잖아. 60년대 당시에는 영화판에서 스칠맨(스틸맨)의 역할이 컸어. 오직 포스터와 스칠(스틸)로 영화홍보를 한 셈이니. 그 사람들이 촬영현장에서 장면을 찍었어. 극장 앞 게시판에 포스터랑 사진이 붙였지. 당시에는 영화 선전 수단이 그것뿐이었어. 그 때 이야기를 신 감독에게 많이 해 주었지.“
Q. [오마주] 영화에서는 커피에 계란을 넣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쌍화차도 아니고. 그게 인상적이었다.
▷유순철: “그 때 명동에는 연극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 당시 국립극장 맞은편에 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마담이 가난한 연극쟁이를 이해했어. 그 사람들이 커피 값이 있었겠나. 그냥 앉아 있는 거지. 그럼 돈 좀 있는 애들이 와서 커피를 사주곤 했지. 광화문에서 서대문쪽으로 옛날에 2층 목조건물이 많았는데 그림 하는 친구들의 화실이 많았어. 그림 그리는 친구의 화실에서 지내기도 했다. 아침에는 명동 나가서 모닝커피 마시고, 계란 하나 넣어서 말이야. 고생 숱하게 했네. 후회 없어. 아직까지 다른 일 안하고 오직 연기만 해.”
유순철 배우는 젊은 시절, 명동의 그 다방에서 수많은 영화인, 문화인, 연극인, 화가, 음악가, 문학인들을 직접 보면서 어깨 너머로 예술과 삶을 배우고, 간접 체험했단다.
▷유순철: “명동에는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주점이라는 술집이 있었어. 당대의 유명 문화인들이 다 모이던 곳이지. 소설가, 시인, 화가들까지. 예술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빈대떡 안주삼아 막걸리 마시며 예술이 어떻고 자기들 지내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난 그 옆에서 들으며 공부를 한 셈이지. 무용가도 있고, 성악가도 있었어. 난 정규대학은 못 나왔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어디 가도 예술이나 이런 데서 꿀리는 것이 없지.”
Q. 김기영 감독의 [고려장]이 데뷔작이다.
▷유순철: “십형제 중에 대사도 없이 쫓아다녀. 내가 네 짼가 다섯짼가 그랬어. 정릉에서 찍었는데 한 겨울에 얼음 위에 올라가고 그랬어. 영화는 처음이었지. 점심으로 도시락 하나 주었지. 출연료가 조금 나왔던 모양인데, 형제로 나온 놈 중에 하나가 그걸 중간에 다 떼먹은 거지. 여하튼 추운데 고생한 기억이 있어. 십형제 중에 이예춘, 독고성이 있었어. 이예춘은 이덕화의 아버지이고, 독고성은 독고영재의 아버지야. 악역으로 많이 나왔었지. 그리고 조석훈이라는 고릴라처럼 인상만 쓰는 친구가 있었고. 이렇게 십형제가 몰려다니는 연기야. 화면엔 얼굴도 제대로 안 나왔어.“
Q.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 있으신지.
▷유순철: “‘이이도’는 김기영 감독이 제작하려고 했었어. 이청준 원작(단편소설)을 고대로 흑백영화로 촬영한다고 그랬지. 문예영화로. 원작은 국방부, 해군정훈부에서 이어도를 탐방하는 내용이었어. 감독이 날 천남석 기자로 캐스팅한다고 그랬어. 김기영 감독 말하는 스타일이 있어. (걸걸하게 흉내 낸다) ‘유순철, 이제 스타 됐어. 으흐흐... 이제 돈도 주고. 완전 스타 됐어. 혜성같이 나타난 스타!’ 이렇게 말했지. 원작 읽어보고 나름 천남석 기자에 대해 분석도 했어. 현장에 가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지만 역할의 성격을 찾는 거였지. 그런데 김 감독이 자신이 없었는지 며칠 지나보니 동아수출공사가 제작을 한다고 그러네. 그때 한참 흥행영화 많이 하던 제작사였어. 신성일, 엄앵란 같은 배우가 하루에 열편 씩 영화 찍던 때였지. 동아에서 ‘이어도’를 컬러로, 현대판으로 각색하는 거야. 해군정훈장교가 나오는 함정이 관광선으로 바뀌었어. 젊은 시대로 옮긴 거지. 주인공은 젊은 최윤석(1946~)으로 캐스팅되었어. 신필름에 있던 TBC탤런트야. 난, 최윤석 아버지 역을 맡게 되었고. 제주도 한림읍에서 한 20일 촬영했나? 그것이 [고려장]에 이은 나의 두 번째 작품이지.”
(1946년생 최윤석은 1971년 TBC방송국 연기자 공채시험에 합격해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기영 감독 [이어도]로 영화배우 데뷔를 했다.)
Q.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에서는 우리나라 두 번째 여성감독 홍은원 감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당시 영화 촬영현장에서 여자 스태프를 보기 힘들었나?
▷유순철: “스크립터는 전부 여자였어. 그리곤 전혀 없었어. 아, 김기영 감독의 조감독 중에 여감독이 있었던 것 같애.”
Q. 몇 편의 상업영화에서 기억나는 단역을 했어요.
▷유순철: “[택시운전사]. 송강호에게 광주 가는 길 알려주던 밭갈이하던 농부 역이었지. 류승완 감독의 [아라한장풍대작전](2004)에선 청맹과니(노인흑운)로 나왔지. 뿌연 렌즈를 양쪽에 끼지 잘 안보였어. 그 영화 조감독 하던 애가 감독 입봉하면서 날 불러줘서. 주지스님으로 잠깐 나오는 작품이었어.”
Q. 작품 출연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나요.
▷유순철: “저예산영화, 독립영화에 출연하면 그쪽 사정에 따라 출연했지. 출연료? 제대로 주는 애들도 있고, 깎자는 애들도 있고 그렇지 뭐. 매니지먼트해 주겠다고 하고선 한 작품 하고선 연락이 없네. 그래도 옛날에 알고 있던 애들이 캐스팅 연락을 할 때가 있어. 헛바람 맞는 경우도 많아. 일정 물어보고는 연락한다고 하고선 그만이지. 기분 나쁘지.”
Q. 아직도 선생님을 알아보시는 작품이 있나요.
▷유순철: “‘엽기적인 그녀’에서 한 씬 나왔는데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더구. ‘선생님 엽기적인 그녀’에 나오시지 않았나요‘하고선.’
Q. 요즘 극장에서 영화 보시는지.
▷유순철: “요즘은 영화 잘 안 봐. [오마주] 하나 봤네. 아, [기생충] 봤었네.”
유순철 배우는 요즘도 여의도 KBS별관 2층에 있는 KBS탤런트실로 나와 소일한다. 그러다가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자신의 연기가 필요한 곳에서 불려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노익장을 불태운다. 이날 인터뷰에서 유순철 배우는 1960년대 충무로이야기뿐만 아니라 TBC동양방송, MBC, KBS의 초기 탤런트 공채와 관련된 경험담도 털어놓았다.
유순철 배우가 출연한 [고려장]은 영상자료원에서 4K 디지털로 복원한 영상을 볼 수 있다. 원본에서 24분 가량은 화면은 유실되고 음향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는 지난달 26일 개봉되어 아직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