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폐간된 전설의 영화잡지 《키노》 기자를 시작으로 영화주간지 《씨네21》의 기자와 편집장을 거쳐 지금은 JTBC ‘방구석1열’에서 만나볼 수 있는 주성철 기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홍콩영화’ 전문가이다. 오랫동안 매체기자로 일하며 왕가위, 성룡, 유덕화, 양조위, 허안화, 담가명, 엽위신, 증국상, 주성치, 홍금보, 적룡, 오가려, 임달화, 이연걸, 양자경, 견자단, 유청운, 여명, 오우삼, 두기봉, 유위강, 맥조휘, 이인항, 팽호상 등 수많은 홍콩 영화인들을 인터뷰했다. 그가 최근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10여 년 전, 출판사 달에서 처음 출간된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 홍콩, 영화처럼 여행하기]의 수정 증보판이다.
홍콩을 처음 찾는 사람에겐 그다지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니다. 다른 여행안내 서적에는 다 있는 여권발급에서 비행기티켓, 숙박안내, 맛집 소개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되는 책임에 분명하다. 예를 들어 냇킹콜의 ‘Aquellos ojos verdes’가 흘러나오던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스테이크를 먹던 레스토랑은 어디일까. 아직도 있을까. 장국영이 즐겨 찾았다는 딤섬집인 예만방은? <천장지구>에서 유덕화와 오천련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려가서 식을 올렸던 곳은 어디일까. (그 곳에 간다면 비욘드의 음악은 반드시 준비해야할 것이다) 주 기자는 <열혈남아>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키스를 나눴던 홍콩 란타우섬의 공중전화 부스까지 찾아낸다. 이런 홍콩영화 전문가가 또 있으랴! 혹시 홍콩영화 매니아라서, 홍콩 갈 일 있으면 이 책 꼭 먼저 찾아 읽고 여행계획 다시 짜 보시길.
책 이야기를 핑계 삼아 주성철 기자를 만나 홍콩여행과 홍콩영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요즘은 영화평론가 직함으로 활동 중이다. TV예능 패널로도 나오고, 유튜브 영화채널도 열심이다.
Q.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극장에서 처음 본 홍콩영화가 무엇이었나.
▷주성철: “소림사 영화인 것 같다. 상의를 탈의한 남자들이 나오고 머리(이마)에 점을 찍었고, 뭔가를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 복수하는 영화이다. 왠지 모르게 끌리는 것이 있었다. 그런 이미지가 영화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체험이었다. 나중에 <영웅본색>을 보면서, 이런 것을 영화라고 부르는구나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영화사랑은 홍콩영화 <영웅본색>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Q. 너무나 대중적인, 그래서 평가절하 되기도 하는 ‘홍콩영화’ 매니아가 가장 현학적이라는 영화잡지 《키노》 기자로 영화기자 인생을 시작했다.
▷주성철: “그때는 진지했다. 장르 영화를 좋아했다. 유별난 취향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나름 키노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홍콩영화’를 강조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나는 당당하게, 진지하게 공채로 키노 간 사람이니 의심하지 말아 달라.”(웃음) (주 기자는 행정고시를 진지하게 준비하다가, 일반회사에 취직했고, 곧바로 영화기자가 되고 싶어서 [키노]에 입사했단다.)
Q. 주 기자의 글을 보면 부산의 이른바 삼류극장 재개봉관을 섭렵한 정서가 있다. (주 기자의 최근 페북 글을 보면 [파친코] 관련 내용이 있다. 오사카에서 찍은 줄 알았던 곳이 사실은 부산이었다.)
▷주성철: “범일동, 범천동 일대이다. 그곳에는 보림극장, 삼일극장, 삼성극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재개봉관에서 재탕, 삼탕 영화를 돌렸었다. 그곳에서 영화를 많이 봤었다.”
Q. 《키노》를 거쳐 나중엔 《씨네21》 기자가 되어 편집장까지 올랐다.
▷주성철: “하하. 키노가 문을 닫고, 필름2.0 갔다가, 그곳도 문을 닫고. 씨네21갔다. 알고 보면 씨네21도 굉장히 좋은 영화잡지이다. 사실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으니 영화전문매체 기자들은 동지 같다. 독립군 같은 느낌도 들었고.”
Q. 방금 말한 대로 영화잡지들이 많이 사라졌다. 현재의 매체 환경이 녹록치 않다.
▷주성철: “딱 20년 되었는데. 같이 일한 선배, 동료들 중에 많이들 현직을 떠났다. 학교에 있거나,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거나, 영화제에서 활약하신다. 영화계 언저리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이화정 기자, 김도훈 기자와 함께 유튜브 활동도 하고 있다.”
Q. 주성철 기자는 영화관련 서적을 꽤 많이 내었다. 이번 책은 증보판이다.
(리뷰와 인터뷰 등 영화기자의 엄밀함을 다룬 ‘영화기자의 글쓰기수업’, 배우 장국영에 대한 애정이 페이지마다, 문장마다 뚝뚝 떨어지는 ‘그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 그리고 한국의 기라성같은 감독들의 데뷔 순간의 감격을 기막히게 포착한 ‘데뷔의 순간’ 등이 모두 주 기자가 쓴 책이다. 그 외에도 많다.)
▷주성철: “책 내는 게 너무 힘들다. 그리고 품이 많이 든다. 이 책만 하더라도 제작비로 따지자면 어마어마하다. 좋아서 홍콩 간 것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두 달 동안 매주 주말을 이용하여 8번 연달아 홍콩에 갔었다. 더 쓰고 싶은 책들이 있지만 발품을 팔고 경비를 생각하니 더 이상은 못하겠다. 주성치나 유덕화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이 있었는데 엄두가 안 나더라.”
Q.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는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
▷주성철: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사와는 또 다른 책을 내기로 했다. 예정대로라면 작년 취재를 마치고 올해 출간되어야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미뤄졌다. 준비는 하고 있다. 뉴욕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뉴욕과 영화.”
Q.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이란 제목은 잘 지은 것 같다.
▷주성철: “출판사 달에서 제목을 잘 지어주셨다. 홍콩을 처음 가면 좋지만 색다른 컨셉으로 가고 싶다면 어떨까라는 느낌이 든다.” (출판사달의 이병률 대표는 시인이기도 하다)
Q. 씨네21 편집장을 오래 했다.
▷주성철: “한 5년 했나? 조선희, 남동철 편집장과 나까지. 5년을 넘긴 경우이다. 씨네21도 힘들었다.”
Q. 그래도 밖에서 보면 영화저널 중에 《씨네21》이 가장 영화판과 가까운 것 아닌가? 단독이나, 특종, 인터뷰 섭외 측면에서 말이다.
▷주성철: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씨네21》을 포함한 이른바 ‘영화전문지’의 위상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문득 이 일도 참 재미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노》와 《씨네21》이 한창 시절에는 뭔가 특별한 영화취재가 있었는데 말이다. 예전에 영화인과 근접 대면의 기회가 많다보니 그런 분위기에 취해 일을 했던 것 같다. 일도 많고, 급여 수준도 낮았지만 말이다. 촬영현장을 마지막으로 간 게 ‘명량’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영화잡지 기자의 롤이 특이하다. 영화인도 아니고, 보통의 기자도 아닌 것 같고. 아마 한국에서만 가능했던 포지션인 것 같다.”
주성철 기자는 홍콩영화배우, 홍콩영화 감독만 인터뷰한 게 아니다. 박찬욱 감독, 김지운 감독, 류승완 감독 전담기자였다. 한국영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 그 생생한 현장에서 한국영화를 지켜보고, 인터뷰하고, 기사로 전했었다. 기자의 복이라면 복일 것이다.
“올 컬러 인쇄에 유통망 확보 등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무너졌다. 요즘 같은 때는 《필로》 같은 잡지가 더 잘되는 것 같다. 제작비를 줄여 원하는 독자에게 다가가는 그런 잡지.”
모든 올드미디어, 레거시 미디어의 황혼이 그러하듯 주성철 기자의 영화잡지사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우울하다. 어쨌든, 오랜 필드를 떠난다.
Q. 영화잡지 출신 기자들이 뭉쳐 영화전문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주성철: “[무비건조]를 1년 정도 넘게 하였다. 같이 일한 이화정기자 김도훈 기자, 그리고 음악평론하는 배순탁 작가와 같이 진행하는데 나름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재밌게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었다. 반응이 좋아 섭외도 생각 이상으로 잘된다. 유튜브를 하면서 이제는 진짜 사람들이 매체를 대하는 태도, 소비하는 형태, 환경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선 반응이 즉각적이다. 이전에 잡지 일을 할 때는 오프라인에서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Q. 《키노》에서 영화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정성일 편집장은 어떤 사람이었나.
▷주성철: “정 편집장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신다. 그분의 엄청난 능력은 따라갈 수 없다. 압도적인 능력자이다. 아마도 이동진 선배가 하셨던 얘기로 기억되는데, 전 세계 평론가들이 하나의 언어로 비평대회를 연다면 그분이 1등할 것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능력과 태도, 진지함은 최고이다. 정 편집장의 평론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책 제목부터 그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 같다. 지금도 영화개봉에 맞춰 GV를 하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린다. 4시간 넘는 [고령가소년살인사건] 영화 끝내고 GV를 4시간씩 하는 분이시다. 놀랍지 않은가. 진짜 그분하고 짧게나마 함께 일한 게 개인적으로 뿌듯한 자랑거리이다. 내가 어떤 방향을 잡는데 영향을 주신다. 넘사벽이다. 그래서 다른 분야는 모르겠고 감히 홍콩영화로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해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Q. 언젠가부터 해마다 4월이 되면 장국영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2003년 4월 1일, 마흔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기억이 나는가.
▷주성철: “그날 저녁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내 핸드폰 연결음은 ‘당년정’이었다. 친구가 전화를 해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순간 어떤 특별한 느낌은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영화기자가 되면 내가 좋아하는 홍콩 영화인들 인터뷰 기회가 많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때는 이미 홍콩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하는 일도 드물어졌고, 홍보를 위해 한국에 오는 일도 사라졌다. 장국영은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실물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실망한 것인지 모른다.”
Q. 바보 같은 질문을 하자면, 장국영, 유덕화, 주성치 등 그 시절 홍콩 스타 중에 누굴 가장 좋아하나, 혹은 좋아했나.
▷주성철: “장국영을 좋아하는데 그건 빼고. 유덕화와 주윤발 형님 중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윤발이 형님이 끌리지만. 유덕화는 많은 영화에서 죽는 연기를 펼쳤다. 자기 일 때문에, 혹은 복수를 위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해 죽는다. 그게 강조되는 연기를 펼친다. 감정이입이 잘된다.”
Q. 주 기자는 오래 전 한 잡지에서 개그맨(희극인)에 대한 글을 연재하기도 했었다.
▷주성철: “내가 홍콩영화만 보는 줄 아는 모양인데.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애정하고 있다. 그리고 서브컬쳐 전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다. ‘저런 것만 좋아하는 모양이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하고 싶은 것 즐기면서 살고 싶다. 굉장히 진진한 사람이다. 그랬으니 키노 입사했겠지.”
Q. 영화잡지 편집장 출신으로 요즘 주목하는 한국 영화감독이 있다면.
▷주성철: “지난 몇 년간 여성감독들이 주목받고 있다. [벌새]의 김보라 감독, [메기]의 이옥섭 감독,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 [남매의 여름방]의 윤단비 감독. 이들이 희망인 것 같다. 이분들의 이후 행보가 궁금하다.”
Q. 마지막으로 홍콩영화 전문가로서 그냥 이 시점에서 자신의 홍콩영화 베스트를 뽑는다면?
▷주성철: “순위 정하지 않고 다섯 편만 꼽자면, ‘영웅본색’, ‘성항기병’, ‘해피투게더’, ‘연지구’, ‘흑사회’이다.”
아마, 이들 영화를 안다면, 주성철 기자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 영화들이 뇌리를 스칠 것이다.
주성철 기자를 만난 것은 책 때문이었으니. 예전에 나온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 홍콩, 영화처럼 여행하기]는 얼마나 팔렸는지 물어보았다. “5쇄까지 나왔으니 많이 팔린 것”이란다.
이제 코로나도 극복되는 분위기이니, 혹시 홍콩으로 여행 가실 분들은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를 챙겨보시길. 만약 장국영, 유덕화, 주성치가 나왔던 영화를 봤다면, ‘영웅본색’, ‘성항기병’, ‘해피투게더’, ‘연지구’, ‘흑사회’가 자신의 인생의 영화라면, 그 배우가 나왔던 그 영화의 현장을 한번 직접 가 보시길. 주성철 기자가 씨네필의 열정으로 그곳을 미리 다녀온 것이다. 그 곳에 가면, 그 시절 우리를 설레게한 홍콩영화의 감동, 재미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때의 열정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참, 주 기자의 한자이름은 朱晟徹이다. 홍콩 스타 주성치(周星馳)와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