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스태프로 일했던 이제한 감독이 [소피의 세계]로 장편영화 감독 데뷔를 한다. 창 너머로 인왕산이 내다보이는 북촌마을의 작은 집에 수영(김새벽)과 종구(곽민규) 부부가 살고 있다. 수영은 인터넷을 보다 소피(아나 루지에로)의 여행블로그를 보게 된다. 소피는 2년 전 서울을 찾았을 때 그들 집에 사흘 가량 머물렀다. 그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수영은 소피의 추억을 따라 북촌을 거닌다. 이제한 감독을 만나 ‘소피의 세계’와 북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곽민규 배우가 연기한 종구 역할에 대해.
▷이제한 감독: “단편 [마지막 손님](2020)을 찍을 때 출연을 부탁했었다. 보통 배우 찾을 때 사진을 보고, 인터뷰를 찾아본다. 인상이 너무 좋았다. 아쉽게 스케줄이 겹쳐 함께 하지 못했다. 일면식도 없는데 거절하실 때 정중하게 긴 문자를 보내주셨다. 시나리오도 잘 보았다는 말까지.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믿음이 갔다. [소피의 세계]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 민규씨가 떠오르더라. 곽민규 배우가 찍은 [홍콩 멜로]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굴이라고 생각되어 제안을 드렸다. 시나리오 보고 재밌다고 했고, 같이 하게 되었다.”
Q. [소피의 세계]에서 곽민규 배우가 김새벽과 다투는 장면은, 지질한 남자의 극치 같았다. 곽민규 배우가 출연한 단편 [오늘](2018)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제한 감독: “캐스팅하고 나서 전작들을 봤는데, 난 [파도를 걷는 소년](최창환 감독, 2019)에서의 김수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말씀하셨던 지질함보다는 민규 배우가 갖고 있는 인간적이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 점이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Q. 그 장면에서 수영(김새벽)과 종구(곽민규)는 무려 7분 이상을 열정적으로 싸운다. 현장에서 애드립이 많이 들어갔을 것 같은데.
▷이제한 감독: “대사에서 애드립은 거의 없었다. 쇼트 자체가 길다. 8분 좀 넘었다. 시나리오 상으로 7페이지 정도였다. 두 분이 연기하면서 조금 달라진 부분을 있지만 디테일하게 액션 까지 상세하게 시나리오에 썼었고, 그에 맞춰 배우가 정확하게 연기를 해주셨다.”
Q. 창밖으로 저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촬영이 이뤄진 곳은 감독님의 집이기도 하다. 익숙한 풍경이다.
▷이제한 감독: “그 집이 앞길이 언덕으로 되어 있고 풍광이 좋다. 코로나 때문에 지금은 덜하지만 이곳으로 구경 오는 분이 많다. 정독도서관에서부터 천천히 산책하며 올라오면 된다.”
Q. 홍상수 감독 작품에서 봤던, 혹은 봤음직한 카페도 등장한다. 그 조금 위에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 촬영한 카페('지유가오카핫초메')가 있다. 영화에선 그곳도 아주 잠깐 화면에 보인다.
▷이제한 감독: “영화에서 소피가 돌아다니는 곳이 다 그 동네이다. 카페('이드라') 사장님과도 친하다.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그 곳을 많이 애용했었다. 그런 경험들이 시나리오에도 반영된 것 같다.”
Q. 전원사에서 일하며 홍상수 감독 작품에 참여했다. 자신의 작품 세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이제한 감독: “영화 찍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촬영할 때는 제작부 비슷한 위치였고, 색보정 작업을 했다. 연출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익히면서 감독이 된 셈이다. 홍상수 감독님을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능력에도 못 미치고. 본인만의 창작방식이 분명히 있다. 나름대로 그때 보고배운 것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도 있을 것이다.”
Q. 홍상수사단 중에는 김초희 감독(‘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감독)도 있다. 같이 일한 적이 있는지.
▷이제한 감독: “전원사에서 일할 초기에 김초희 감독님은 피디로 일하고 있었다. 한 3년 정도 피디님 밑에서 잡다한 일 했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소피의 세계] 상영할 때 김초희 감독님이 심사위원으로 오셨다. 개막식 때 반갑게 인사 나눴다.”
Q. 외국인 소피가 한국을 찾아 북촌을 거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영어가 많다. 배우들이 영어 대사를 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 같다.
▷이제한 감독: “처음에 영어 대사를 쓰고 배우에게 보여주었을 때 배우들이 조금 걱정을 했다. 모국어 연기하는 것과 외국어 연기하는 것은 차이가 있으니. 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본인의 방식대로 우리말 하듯이 영어로 연기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테이크가 길게 가는 장면은 대사 외는 게 걱정스러울 수도 있었다. 현장에선 문제없었다. 특히 우겸 배우가 소피와 대사 나눌 때 대사가 길었다. 토씨하나 안 틀리고 다 외워왔다. 현장에서 감동했었다.”
Q.소피를 연기한 아나 루지에로라는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었나.
▷이제한 감독: “소피를 연기한 배우는 아나 루지에로(Ana Ruggiero)이다. 외국인 연기자를 찾다 실패했다. 인스타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모델과 배우들이 홍보를 위해 인스타를 많이 하더라. 아나는 자신의 인스타(@anaruggi)에 그동안 자기가 한 작업물을 올려놓았다. 사진마다 표정이 다 달랐다. 같이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연기 경험이 걱정되었다. 한국노래를 커버한 동영상도 있는데 음악을 들으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감정이 느껴져서 충분히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DM을 보내고 만나 뵙고 싶다고 했다. 딱 보는 순간 이 사람이 소피겠구나 싶었다. 엄청 조심스러웠다. 아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시나리오도 고쳤다.”
Q. 영어 시나리오를 직접 썼나.
▷이제한 감독: “직접 대사를 썼다. 문법적으로 맞는지 걱정이 되어 검수를 받았다. 한글로 상세하게 의미를 붙여서. 대사를 고치면서 의미가 풍부하게 바꿔주셨다. 후회하기도 했다. 왜 외국인 대사를 하려고 했는지...”
Q. 삼청동에선 외국인을 만나기 쉽다. 소피는 에어비앤비 손님인가?
▷이제한 감독: “소피라는 캐릭터를 떠올린 것도 이 동네에 살기 때문일 것이다. 경복궁역이나 광화문역 근처를 지나면 배낭여행 온 외국인을 많이 보게 된다. 소피는 에어비엔비로 머무르는 설정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이곳 풍경도 많이 변했다.”
Q. 김새벽 배우는 독립영화계의 여왕 같다.
▷이제한 감독:“김새벽 배우는 단편 [마지막 손님]에 출연했었다. 처음 본 것은 10년쯤 된다. 처음 지인의 단편 찍을 때 동시녹음을 담당했었다. 인상이 좋아 친해지고 싶었지만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마지막 손님] 작업할 때 새벽 씨가 떠올랐고,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었다.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배우로도 존경한다.”
Q. 신석호 배우도 등장한다. 최근 홍상수 감독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이다. 홍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같은 배우를 계속 출연시키는데 옆에서 지켜봤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이제한 감독: “신석호 배우는 홍 감독의 [인트로덕션]에 출연했다. 홍 감독님이 배우를 선택하는 기준은 모르겠다. 제가 생각하기엔 좋은 사람이 있다면 굳이 작품마다 다른 얼굴을 찾기 보다는 같이 했던 배우 계속 쓰는 모양이다. 현장에서 좋았으니까 계속 같이 작업하시는 듯하다. 인간적으로 믿음이 가는 사람 말이다.”
Q. 그러고 보니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서영화 배우도 출연한다.
▷이제한 감독: “서영화 선배도 배우로, 사람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다. 예전에 독일에서 촬영할 때 뵈었었다. 같은 숙소에서 며칠 같이 지냈는데 좋아하게 되었다. 이번 작품 쓰면서 같이 하고 싶어서 부탁을 드렸다. 제가 찍은 단편과 [소피의 세계] 시나리오를 보여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라고 말씀드렸다.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흔쾌히 답변 주셨다. 단편도 보시고, 시나리오도 그날 다 보셨다고 하시더라.“
Q. 그 때 독일에서 찍은 영화는 무엇인가.
▷이제한 감독: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이다. 홍 감독님은 이번에 베를린에서 또 상 받으셨다.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Q. 현역 영화인 부부이다. 지금 옆에 있는지? (화상인터뷰였음.)
▷이제한 감독: “김수민 감독은 지금 다른 작품 촬영 중이다. 영화는 아니고 드라마이다. 영화도 하고, 드라마도 하고, 간간히 뮤직비디오도 찍는다. [거인]을 찍었었고,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의 촬영을 맡았었다.”
Q. 삼청동 근처, 북촌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시민의 이야기이다. 혹시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이나 사람들 이야기에 자전적이거나 자신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지.
▷이제한 감독: “모든 게 픽션에 가깝다. 대신 제가 실제로 가는 공간이 경험이라면 경험이다. 그 카페에서 이 시나리오를 썼었다. 그런 정서가 스며들어갔겠지만 상황은 제가 만들어낸 것에 가깝다. 자전적인 지점은 없다.”
Q. 영화 마지막에 인왕산에 올라가서 자기가 살던 집을 내려다본다. 인왕산에는 자주 올라가는지?
▷이제한 감독: “영화 찍으며 처음 올라갔었다. 매번 창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산에 올라가니 새로운 생각이 들더라.”
Q. 개봉을 앞둔 소감.
▷이제한 감독: “제가 괜히 이런 영화를 내놓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잖아요. 이렇게 보였던 게 저렇게 생각했던 게 지금 다시 보면 달라 보이듯이. 그런 마음과 이 영화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개인적으로 좋았다. 감흥이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 분들도 극장 나가면서 작지만 소소한 감흥 같은 게 들었으면 좋겠다.”
Q. 홍상수 감독 작품을 많이 보셨을 것이다. 베스트를 뽑는다면.
▷이제한 감독: “베스트 보다는 작업을 하면서 여러 번 보았다. 여러 번 본 것은 [강변호텔]이다. 재밌었다.”
Q. [강변호텔]은 나도 재밌게 봤다. 영화 이야기보다, 홍상수 감독 영화는 보고나서 구글맵을 통해 촬영장소를 찾아보게 되더라.
▷이제한 감독: “그렇다. 영화 보신 분이 촬영한 장소를 찾아 인스타에 올리는 분들이 많더라. 연출하는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좋다. 이 영화도 그랬으면 한다. 촬영한 장소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은 없을 듯하다.”
Q.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소피의 세계]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이제한 감독: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지 마음속에 생기는 것 같다. 처음 시작할 때는 솔직히 장편을 쓸 수 있을지 의심했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는 이걸 찍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배우들이 같이 할 수 있을까, 지원금 받은 수 있을까. 매 단계 의심을 했다. 정신없이 진행한 것 같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지 그 생각만 하고 개봉까지 왔다. 이제 다음 영화를 쓰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김새벽, 곽민규, 아나 루지에로, 김우겸, 문혜인 등이 출연하는 이제한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소피의 세계]는 오늘(3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