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단편야화(夜話)전’이라는 타이틀로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영화’ 세 편이 영화팬을 찾는다. 김의석 감독의 <오명>, 박우건 감독의 <서스피션>, 이준섭 감독의 <칠흑>을 만날 수 있다. 겨울 한밤에 만끽할 수 있는 신선한 작품들이다.
<오명>은 <죄 없는 소녀>로 주목받은 김의석 감독이 2015년 만든 16분짜리 단편영화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보일까. 구교환은 학교 선생님이다. 학생 둘-태호와 유진-을 소형버스에 태우고 직접 수학여행지로 이동 중이다. 밤 시간, 국도를 열심히 달린다. 룸미러로 보니 태호는 자고 있고, 유진의 짧은 치마가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차가 터널로 들어가는 순간, 무슨 일이 생긴다. 경찰은 구교환에게 사고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졸음운전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반대방향에서 달려오던 차의 운전수는 즉사했단다.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구교환은 다시 운전을 한다. 이젠 태호와 유진에게 입단속을 시킨다. “갑자기 저쪽 차가 우리 차선으로 들어왔고, 우린 급하게 세웠고, 저 차가 사고가 난거야.”라고. 그런데 듣고 있던 태호가 “그게 아닌 것 같아요”란다. 선생님은 이제 학생들을 설득하든지 윽박지르든지, ‘사고 순간’을 조정해야한다. 선생님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아님 오명을 뒤집어서기 싫은 것인가.
김의석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우리가 삶의 기준으로 삼는 인간의 판단력, 기억력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그 유약함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뚜렷하게 사고의 순간을 보여주지도, 사고 현장을 관찰하지도 않는다. 뭔가 애매한 스탠스의 경찰과 의심스러운 선생님의 대화,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생의 증언으로 ‘보지 못한 사건’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과연 구교환이 순간적으로 운전에 주의를 집중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사고는 왜, 어떻게 났는지 모든 것이 ‘안개’에 쌓인다. 관객들이 주의 깊게 보시길. 구교환의 독립영화를, 김의석의 단편을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참, 오늘 [독립영화관]에서 방송되는 박우건 감독의 <서스피션>은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 제목과 같다. 그런데, 히치콕에게는 ‘오명’(Notorious)이라는 작품도 있다. ‘거짓증언 사주극’은 아니고, 2차 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 첩보물이다. 어쨌든 오늘밤은 히치콕스러운 밤이 될 것 같다.
▷오명 ▷연출/각본:김의석 ▷출연:구교환(선생님), 고태호(학생), 오유진(학생), 박길수(경찰)
■ 인터뷰: 김의석 감독 “‘오명’에 대해 궁금한 것들”
Q. <오명>의 이야기는 처음 어떻게 떠올리게 되었는지.
▷김의석 감독: “어느 시절을 함께 겪은 이들이 그 시절을 다르게 기억하는 경험을 하고, 이걸 이야기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Q. 각자의 시각에 따라 사건의 진술이 다른 것은 <라쇼몽>이 떠오른다.
▷김의석 감독: “<오명>을 찍을 때 <라쇼몽>을 많이 봤고 참고했다. <라쇼몽>처럼 각자 상황을 다르게 인식하는 인물들을 고루 분배하는 방법보다는 한 인물에 집중하고자 했다. 자신이 굳게 믿고 있는 인식과 다른 견해가 충돌하면서 스스로를 의심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진실 되고, 무결하다 믿었던 사람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과정 자체에서 폭력적으로까지 변해가며 내면의 악과 만나게 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
Q. 제목을 ‘오명’으로 한 이유는?
▷김의석 감독: “처음 제목은 <안개>였다. 자욱한 안개가 프레임에 가득했으면 생각했다. 후에 주인공의 감정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제목을 찾았다. 그가 가지는 감정의 근원지가 어디일까 고민하다 얻은 제목이다.”
Q.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뭔지 알아? 자길 속이는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 속 ‘오명’은 무엇인지.
▷김의석 감독: “그 대사는 진실이 아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일 뿐이다. 선생님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스스로 무결함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가르침 같지만 저 말을 학생에게 뱉으면서 ‘오명’을 얻기 싫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명’이나 ‘전락’을 두려워하여 발버둥치는 심정이 드러났으면 했다. ‘오명’은 그가 만약 학생들과의 이 대결에서 지게 된다면 얻게 될 도덕적 추락이라고 생각했다.”
Q. 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인 터널과 버스가 주요 공간이다.
▷김의석 감독: “한정된 공간인 동시에 이동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창밖의 배경이 때에 따라 바뀌고, 움직이는 무대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세트장처럼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또 자유롭게 배경을 바꿀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한정된 공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야외처럼 춥고, 컨트롤 되지 않아 세트처럼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인물의 감정이 영화 속에 담겨 있을 거라 생각한다.”
Q. <구해줘> 이후, <오명>에서 다시 구교환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김의석 감독: “구교환 배우와 작업하면 즐겁다. 구교환 배우 역시도 저랑 작업하는 걸 즐거워할 거라 믿고 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친한 사이였고, 당시에 내가 쓰던 시나리오 주인공은 다 구교환 배우였다. 언젠가 다시 함께 작업할 것이라 확신한다. 분명 그 시절처럼 순수하게 영화 촬영 자체를 즐거워하며 찍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구교환 배우는 천부적인 센스가 있는 사람이다. 구교환 배우는 사소한 것도 남들과 다르게 접근하고, 다른 생각을 하려는 노력과 에너지가 있다. 구교환 배우를 계속 지켜본다면 더 놀라고 행복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Q. 오유진 배우가 연기한 극 중 ‘여학생’ 역할도 보는 사람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 보인다. ‘여학생’ 역할을 통해 감독님이 보여주고 싶었던 무엇인지.
▷김의석 감독: “선생님은 남학생과 언쟁하며 여학생에게 은근슬쩍 도움을 구한다. 선생님은 여학생을 공범으로 만들려고 기억을 왜곡시킨다. ‘여학생’ 캐릭터는 아주 미묘한 흐름을 포착하여 언쟁에 개입해야했고, 또 동시에 선생님의 논리에 편을 들어주기도 반대로 도덕성에 경종을 울리기도 해야 한다. 셋 중 사고의 죄책감을 가장 크게 겪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학생’을 연기한 오유진 배우는 저보다 더 인물의 깊은 감정을 넓게 깊숙이 이해하고 있었고, 생각지도 못한 톤으로 중심을 잡아주었다.”
Q. <죄 많은 소녀>, <인간증명> 이후 근황은.
▷김의석 감독: “코로나 생각뿐이다. 언제 끝나나, 어떻게 되려나. 계속 작업 중입니다. 빨리 새 작품을 만들고 싶다. 더 큰 시장에서 더 많은 분들께 보여드리고 싶다. <오명>은 2015년 만든 습작인데 이렇게 또 많은 분들께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다.”
** 김의석 감독과의 인터뷰는 KBS 독립영화관 송치화 작가와의 서면인터뷰로 진행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