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2020년) 가을 열린 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 독립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감독:김지석)가 곧 개봉된다. 이 영화는 알코올에 의존하는 남자(강길우)와 세상을 피하고 싶은 여자(박가영)가 함께 태백으로 죽으러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관객들은 배우의 애틋한 연기와 감독의 절제된 연출로 태백의 안개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간다. 여주인공 류화림을 연기한 배우 박가영을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어떻게 이 영화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박가영: “감독님이 제가 출연한 작품을 보셨는지 메일로 연락을 주셨다. 감독님 자기소개랑 글을 보내주셨다. 시나리오가 아니라 소설 같은 형태였는데 흥미로웠다. 감독님 만나 글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그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면 매력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Q. 촬영기간이 어떻게 되는지
▶박가영: “5회차 촬영이었다. 몰아서 찍은 것은 아니고, 2주에 걸쳐 나눠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태백으로 떠나기 전 분량 먼저 찍고, 그 다음 주 태백으로 떠나는 여정을 찍었다. 짧은 시간에 장편 하나를 찍은 것이다. 실내가 아니라 로케 촬영까지. 타이트하고 빠듯한 감이 있었지만 감독님이 촬영, 조명 등 스태프와 손발을 오래 맞추신 분들이라 걱정한 만큼 힘들게 찍지는 않았다. (강)길우 선배랑 촬영을 오래한 느낌이다. 많이 소통하고, 우리 나름대로 재밌게 촬영했다.”
Q. 5일 동안 촬영을 끝냈다면, 태백산의 풍광을 즐길 여유가 없었을 것 같다. 촬영 당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나.
▶박가영: “사실, 저한테는 풍광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냥 모인과 화림이 조곤조곤 이야기 주고받고 걸어간 기억밖에 없다. 여유가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단체사진을 찍었었다. 예쁘더라. 우리가 영화를 예쁜 곳에서 찍었구나 생각했다.”
Q. 감독에게 남자주인공 역으로 강길우 배우를 추천했다는데.
▶박가영: “감독님이 여러 배우를 만나보셨다. 그런데 본인이 생각하는 ‘김모인’이라는 인물에 딱 맞는 배우를 찾을 없었던 모양이다. 저는 글을 보았고, 강길우 배우의 작품을 많이 보았기에,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강길우 배우가 그 역할에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작품에서 화림은 모인의 집으로 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모인에게 조금 무해한 이미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태백의 숲에 있는 시간도 많으니, 둘이 걸어가는 모습이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Q. 시나리오에 박가영 배우의 의견이 반영된 점이 있는지.
▶박가영: “처음 감독님이 주신 글에 다 있었던 내용이다. 대신 들어낸 부분이 있다. 둘이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모습을 고백하는 장면들을 조금 빼면 어떻겠냐고 말씀 드렸다. 이 부분까지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류화림은 진솔한 캐릭터가 아니니까. 그런 의견이 반영된 것 같다.”
Q. 재작년 이 영화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했었다. GV때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시사회 등을 통해 영화 관객을 만났을 때 소감.
▶박가영: “목소리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영화 찍은 지가 오래되었고, 시간도 많이 지났지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영화 속 캐릭터가 제 목소리와 이질적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긍정적으로 봐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시사회를 하며 관객분들을 만났다. 이 영화는 관객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좋아하는 분도 있고, 이게 뭐지 의문을 가지는 분도 있을 것이다. 어떤 분은 실없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뻔한 영화보다는 온도가 다르고, 보시는 분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영화인 것 같다. 그런 다양한 반응이 감사하다.”
Q. 류화림이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캐릭터를 어떻게 분석했는지.
▶박가영: “일단 어떤 인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주변의 인물을 차용하는 편이다. 화림은 혼자 살고 있고, 상처가 있다.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게 없다. 삶의 무력감으로 매일 술을 마신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주위에 그런 분들이 있다. 돌아보니 나 자신도 화림과 맞닿아있는 지점이 있었다. 깊은 우울감을 느낄 때처럼. 솔직하게 오픈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 정도로 거리감을 주고 싶었다. 그 인물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없더라도 그 인물처럼 동요한 지점이 있다.”
Q. 휴게소에서 만난 의문의 남자들을 강도라고 한다거나 그들에게 ‘뒤져’라고 말하는 등 과격하게 반응하는데, 화림의 피해의식과 관련이 있을까.
▶박가영: “화림은 처음부터 그랬다. 슈퍼에서 처음 모인을 만났을 때도 ‘왜 따라 오냐’는 반응을 보였다. 보편적인 점에서 보면 무례하다. 류화림은 혼자서 자신을 보호한 시간이 길었다고 생각한다. 데이트 폭력을 당하면서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뾰족해 있고 날이 서 있는 셈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와 부딪칠 것 같으면 스스로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뾰족함과 날 섬이 생기기 않았을까?”
Q. 류화림은 김모인에게 어떤 존재로 변화했나.
▶박가영:“그 점에 대해서 길우 선배에게 물어보았다. 마음의 변화가 있는지. 길우 선배는 모인이 삶에 대해 일말의 의지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온기를 얻고 삶에 대한 미련이 생길 수 있다고. 물론, 모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좀 더 단단해진다.”
Q. 그럼 이 영화는 ‘새드 엔딩’으로 봐야하는지.
▶박가영: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그런 질문이 많았는데, 결론은 관객들이 내릴 것이다. 영화 끝에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둘이 같이 돌아갈 수도 있고, 같이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고, 한 명만 죽었을 수도 있다. 결말에 대해서 어떻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Q. 신당(점집)을 찾아가서 쌀알을 던져 점을 치는 장면이 있다. 어떤 설정인가.
▶박가영: “점을 치는 장면은 따로 찍지 않았다. 그냥 둘이서 법사를 기다리면서 그곳에 놓인 물건으로 이것저것 해본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곳에 놓인 물건을 만져야하고, 고사 지내는 것처럼 절도 해야 한다고 했다. 길우 선배는 열심히 했는데 나는 안했다. 그런데 그 장면 찍고 바로 목이 쉬었다. 저희들끼리는 그게 미스터리한 일로 남아있다. 그 이후 난 사주도 잘 보고 그런다. 기독교인데 말이다.”
Q. 그 장면에서 법사(무당)가 두 사람을 쫓아내고는 탁자에 흐트러진 쌀알을 보고 얼굴표정이 미세하게 변한 것 같은데.
▶박가영:“법사님 장면은 따로 촬영한 것이다. 우리도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섬뜩했다. 아마도 둘의 앞으로의 행적을 암시하는 것인 모양이다. 우리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걸 느꼈다. 아무래도 올해 어떻게 될지 사주를 봐야겠다.”(하하)
Q. 어제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셨는지. 영화에서 뜻밖의 욕설이 나온다.
▶박가영:“개봉시기가 참 절묘하다. 어제 중계방송 보면서 화가 났다. 갑자기 류화림이 되었다. 사실 그 장면은 모닥불 앞에서 두 사람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영화에서 류화림은 어쩌면 뜬금없이 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Q. 이 작품은 김지석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다.
▶박가영:“감독님은 광고 쪽에서 일한 분이고 영화를 연출한 경험이 없다. 보내준 글을 보면서 광고하시는 분이 쓴 글이라고는 매칭이 안됐었다. 상업적일 것 같았으니. 만나보고는 흥미를 더 느꼈다. 우리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름다운 길이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다. 그들에겐 행복한 여정일수도 있으니. 만나보고 걱정하지 않아도 예쁘게 나올 것 같았다.”
Q. 연기자의 꿈은 언제부터 키웠는지.
▶박가영:“배우의 꿈을 키운 건 아니다. 어쩜 그런 것에 대한 꿈이 없었다. 20대에는 영화라면 관객으로 좋아했을 뿐이다. 배우가 될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취직하느라 이력서도 꽤 많이 썼었다. 작은 영화사에서 일하려고 이력서를 넣었었는데, 어떻게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직원으로 일하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연기에 대한 호기심이 활활 타올랐다. 그게 20대 중반이었다. 1년 정도 열심히 단편영화 찍었다. 그런데 영화를 좋아했지, 연기에 대해서는 몰랐다. 어떻게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단편영화라고 해도 관객에게는 무례한 일일 것 같았다.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연기라는 것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최선을 다해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심을 담아 집중하고 있다. 공부인 것 같다. 어렵다.“
Q. 박가영 배우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박가영: “<온 세상이 하얗다>를 최근에 다시 봤는데 사람들마다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영화 같다. 극장문을 나설 때 나의 삶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이 좋은 영화라고 한다. 부산에서 상영될 때(BIFF) 친구가 보러 왔었다. 보고 나서 새벽에 장문을 카톡을 남겼다. 특이한 구석이 있는 영화라 웃으며 봤는데 자려고 할 때 장면 장면들이 떠오른다고. 죽음으로 다가가면서도 화분에 물을 주고, 강아지가 밥 잘 먹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그런 모습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하더라. 참 좋은 것 같다.”
Q. 영화배우가 되기 전 관객의 입장에서 본 영화 중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면.
▶박가영: “저는 재밌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영화가 직업이 아니었을 때는 저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울게 해주는 그런 영화를 좋아했다. 갑자기 떠오른 작품은 10년 쯤 전에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본 단편이다. <죄 많은 소녀>의 김의석 감독님이 연출한 <구해줘!>라는 작품이다. 정인기, 구교환 배우가 나오는 재밌는 단편이다. 노량진에서 임용고시 준비할 때 혼자 가서 본 영화이다. 영화제에서 단편 서너 개씩 묶어 상영했었는데 그 단편이 기억에 남아있다. 보고나서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았다. 감독님 연출의도가 누군가에게 재밌는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한 것 같다. 감독님의 의도에 적합했던 관객이 저였던 것 같다.”
Q. 이번 주 KBS 독립영화관 시간에 박 배우가 출연한 단편 [서스피션]이 방송된다.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있는지.
(이번 주 ‘독립영화관’에서는 ‘오명’, ‘서스피션’, ‘칠흑’ 등 세 편의 단편이 방송된다. 이중 ‘서스피션’은 박우건 감독의 2020년 작품이다. 신혼부부는 아파트 전세로 살고 있다. 집주인이 전세비를 올려달란다. 남편은 집주인과 함께 술을 마시러 나간다. 그런데 그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주인이 시신으로 발견된다. 출산을 앞둔 아내는 남편을 의심한다. 박가영은 아내 역할을 맡았다)
▶박가영: “아, 그래요? 그 영화는 좋은 기억이 많다. 임산부 역할이어서 힘들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저로서는 집중을 해서 촬영을 했던 작품이다. 배우가 느낀 것을 감독님과 공유하면서. 후반부 한 신은 촬영하면서 바꾼 것이다.”
박가영은 가족 이야기를 담은 로드무비 스타일의 독립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봄에는 상업영화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우연히 배우가 되었고,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 더 열심히, 진심을 담아 연기를 한다는 박가영 감독의 독립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는 내일(10일) 개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