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을 찾아서"
공장에 발을 내디딘 1970년대의 소녀들에게 현실은 어떤 의미였을까. 김정영, 이혁래 감독이 제작한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평화시장 속에서 봉제 노동자로 일했던 소녀들이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했던 싸움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 전시하는 작품이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만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일으킨 '99 사건' 은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 열악한 환경에도 권리를 위해 싸워왔던 소녀들의 흔적을 발굴해 보여준다.
Q. 평화시장 소녀들의 치열한 일상의 기록이 담긴 '미싱타는 여자들'을 처음 기획한 계기는 무엇인가?
김 - 2018년 서울시 의뢰로 서울지역 봉제 노동자 32인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찍었는데 그때 청계피복노동조합 출신의 박태숙, 이숙희, 신순애 선생님을 만났다. 전태일 이야기를 책으로만 접했는데, 실제 그분들의 입에서 나오는 생생한 경험담은 충격이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결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성인 나조차도 잘 몰랐었다. 역사의 빈칸처럼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태일의 죽음에만 맞춰졌던 카메라를 180도 돌려 70년대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분들을 찾아 이야기를 모아서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 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이야기할 때의 생생한 표정을 보게 해주고 싶었다. 즉, 영화라는 매체로 ‘대중적인 기록’을 하고 싶었다.
Q. 그 말대로 전태일 열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지만 그 외에 함께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던 여성 운동가에 대해서는 많이 조명되지 않은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김 - 구술생애사 인터뷰 과정 중 나온 '말'이 있었다. 이숙희 선생님은 전태일이 죽었을 때 사장이 '깡패가 폣병 걸려 죽었다'고 말해서 일했다고 했다. 그리고 전태일 분신 1년 후 모란공원에서 추도식을 할 때도 이숙희 선생님은 빵과 우유를 준다고 해서 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전태일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신순애 선생님은 노조의 노동교실에서 공부하면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너무 강렬하게 해줬다. 은행을 가기 위해 한자 배웠던 이야기 한글을 몰랐던 후배가 있어 도와줬던 이야기 등 생생한 증언이었다.
그때 알았다. 그녀들은 10대 소녀들이었다. 당시 평화시장에 근무하던 만 오천 명의 노동자 중 80퍼센트가 여성이고 그중 절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이었는데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육성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노동교실과 성장,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게다가 인터뷰하다가 쉬는 시간에 신순애 선생님, 박태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트리거가 됐다. 신순애 선생님의 “‘아름다운 전태일’ 영화에선 왜 전태일이 주인공이 아니라 지식인인 문성근이 주인공인가?”라는 말과 박태숙 선생님 지인의 따님의 “영화 ‘1987’에는 대학생들만 나오고 왜 엄마 이야기는 없는가?”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지식인과 남성들에게 가려진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을 찾아서 시작했다.
Q.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담겨 있는 것 같아서 관객 입장에서도 인터뷰이들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출연한 봉제 노동자분들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됐는가?
김 - 서울 지역에 있는 20대에서 80대까지, 총 32명의 봉제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질문지 만들던 중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했던 분들도 만나고 싶었다. 전순옥 전 의원에게 부탁하여 박태숙 선생님을 만났고 박태숙 선생님이 이숙희 선생님을 소개해 주셔서 만났다. 이후 신순애 선생님은 <열세 살 여공의 삶> 책을 내셨기 때문에 출판사를 통해 직접 전화해 만났다.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시 만났을 때 이숙희 선생님은 기록의 중요성을 아시기에 평소 책을 내고 싶어 하셨다.
나머지 분들도 도와주셨다. 이숙희 선생님의 큰 도움으로 임미경 선생님을 만났다. 99사건이 주요 모티브라 결국 신순애 선생님도 참여하고 그 외의 분들은 세분을 통해 소개받아 만났다. 하지만 처음엔 영화 나오시길 꺼려 해서 설득이 어려웠다. 집으로 공장으로 찾아다니며 설득 또는 인사를 하고 전대일 추도식도 가고 결혼식도 갔다. 2019년 4월부터 99사건의 주인공 3인 단독 인터뷰를 해내고 나니 다른 분들도 마음이 열려 공장에서의 단독 인터뷰가 가능했고 99 사건에 있었던 분들을 신순애 선생님과 임미경 선생님이 더 연결해 줘서 집으로 찾아가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두근거리며 찾아가는 나날들이었지만 직접 댁에서 뵈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더 좋았다.
Q.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과거 사진을 교차 편집하는 방식을 넘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와의 인터뷰나 서로를 향한 대담의 형식으로 타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전해져서 몰입도가 더 높았던 것 같다. 이러한 포맷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 우리 영화의 주요 사건은 1977년 9월 9일에 있었던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사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고 사회적인 파장이 컸던 사건도 아니다. 아마 지금 검색을 해봐도 별 내용이 안 나올 것이다. 그런데 당시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10대에서 20대 여성노동자들의 마음에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더 크게 남은 사건이다. 그래서 영화의 방향은 사건의 객관적인 실체를 밝히는 것보다는 40년 전 그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보니 말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보다 생생한 반응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의 표정, 대화 중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 그런 것들을 잡아내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라는 형식을 가져오게 됐다. 더불어 배경에 스크린을 설치해 옛 사진을 영사하면서 두 인물 사이의 반응, 인물과 사진 사이의 반응을 담아냈다. 실제로 대화가 시작되면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심리극을 하는 느낌도 들고 굿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촬영하는 스태프들도 함께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김 - 인터뷰 외에 비주얼 전략이 필요했는데 노석미화가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너무 유명한 화가라서 부탁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혁래 감독의 적극적인 아이디어로 진행했고 결과적으로 영화의 처음을 부드럽게 잘 시작한 거 같아서 좋았다. 노석미 화가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화가이며 책을 많이 낸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물들 인터뷰를 자연스럽게 잘 이끌어갔다. 선생님들의 빛나던 젊은 시절을 노석미 작가의 붓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극장에서 큰 화면에 선생님들의 빛나는 표정을 그린 압도적인 초상화를 볼 생각을 하니 영화 찍는 내내 두근거렸다.
Q. 두 감독이 함께 편집하면서 서로 의견을 내고 보완했던 신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 - 보통 과거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별도의 역사 공부나 사전 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 영화는 그런 것들 없이도 충분히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 일반 관객의 문턱을 낮추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두 감독이 이야기에 접근하는 태도와 직결된 문제였다. 우리는 평화시장 소녀 미싱사들을 유신시대라는 거대한 장기판의 말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부조리한 세계에 맞선 10대의 성장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그들의 고군분투를 따라가다 보면 유신시대라는 부조리한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는 있겠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인물들의 의지, 느낌, 행동에 맞춰져 있다. 우리에겐 거대한 정치적 상황보다 그때 그곳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던 소녀 미싱사들의 마음의 풍경이 훨씬 더 중요했다.
Q. 그렇다. 마냥 고통스럽고 힘든 서사만을 담은 작품이라기보다는 과거 소녀였던 그들이 지금의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당시 평화 시장의 열악한 환경만을 조명한 것이 아닌, 그 당시에 있었던 소녀들의 일상에 대해 담겨 있어서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러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에 감독들이 특별히 기울인 노력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 - 친구를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우정을 쌓고, 함께 여행을 떠나고, 노래를 부르고 글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일은 10대에 당연히 누려야 할 일상이다. 그런데 평화시장의 소녀 미싱사들은 당연한 10대의 일상을 싸워서 얻어냈다. 그래서 소중한 일상의 터전인 노동교실을 빼앗긴 1977년 9월 9일의 기억은 그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비록 인터뷰의 내용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지만, 그 과정에서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소중한 일상을 출연진들이 다시 한번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 40년 전 그때처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여행을 하는 과정을 통해 평화시장 소녀 미싱사 시절의 자신을 만나 스스로 상처를 위로하는 기회를 출연진께 선물하고 싶었다.
김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이 어린 나이였다는 것이었다. 또래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는데 그 대신 공장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던 그녀들의 일상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할 때도 공장에서의 일상에 대한 질문, 노동교실에서의 일상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고 여가 생활을 뭐로 하는지도 물어보려 했다. 또래들과 어울리며 공부하며 노래 부르며 했던 노동교실에 간 것 아이러니하게 그것이 곧 여가생활이란 걸 알게 됐다. 그분들이 고통스러운 99 사건을 떠올리는 것도 있지만 공부하면서 노래 부르며 산으로 들로 나설 때의 마음도 복기하면서 그 당시 일하며 공부하며 싸웠던 자신들이 잘 살았고 자랑스러웠다는 것을 그분들이 스스로 말씀하시며 자각하시는 것 같았다.
특히 그분들의 사진들은 개인들이 주신 사진도 있지만 노조에서의 행사는 노조에서 많이 찍어서인지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각도의 사진들이 많았다. 사진에서의 그녀들은 아름다웠고 생동감이 넘쳤다. 선생님들이 2인 인터뷰에서 사진을 보며 이야기할 때 눈빛이 아득해지고 자신이 예전에 썼던 글들을 낭독할 때 자신이 그런 글을 썼다는 것에 새삼 놀라고 무척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문집의 글들은 놀라운 글들이 많아 사실 현재의 작가 뺨치거나 르포 기자보다도 더 뛰어난 글들이었다. 자신이 쓴 편지와 문집의 글들을 읽으셨을 때의 그분들은 반응을 촬영할 때 가장 몰입했다.
Q. 봉준호, 박찬욱 감독님을 비롯해 정말 많은 영화인들이 '미싱타는 여자들'에 대한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는데 감사의 한마디가 있다면 무엇인가?
김 - 후배 영화인으로서 송구스럽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역시 영화 선배님들이라 달랐다. 박찬욱 감독님이 ‘흔들리지 않게’를 부를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라고 말씀하셨는데 난 촬영할 때 선생님들이 하도 웃으면서 이야기하셔서 잠시 놓쳤던 감정이었다. 나도 저 노래 부를 때 무서웠는데 말이다. 관객들이 모두 영화 속의 인물이 되어 자기의 과거를 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들 정말 감사하다.
이 - 항상 그분들의 영화를 보기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분들이 우리 영화를 보고 칭찬까지 해주시니 신기하고 얼떨떨하다. 모두 출연진 선생님들이 아름답고 진실한 사연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Q.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그 당시를 살았던 이들, 그리고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많은 귀감을 안겨 주고 생각을 던져 주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앞으로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을 찾아줄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김 - 현재가 힘들고 벅차고 그렇더라도 작은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나도 이 영화를 하며 이 늙은 나이에 그분들을 보며 작은 성장을 했으니 말이다.
이 - 젊은 세대들에게 귀감을 안겨준다기보다는 위로와 응원을 전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출연진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이 귀감이 될 만한 분들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면 엄청 싫어하실 거다. 대신 옆에서 조용히 응원을 하실 것이다. 지금 젊은 너희들도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이제 노년을 앞둔 평화시장 소녀 미싱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젊은 세대들도 외로워 말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 영화를 만들면서 우리 제작진도 똑같이 힘을 얻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영화를 보고 나서 엄마, 또는 아빠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부모님은 청춘기에 어떤 일로 울고 웃었는지 한 번쯤 물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