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나이 40, 여자 나이 12'. 남자는 미성년자 성적학대 혐의로 감옥생활을 했다. 석방된 뒤 이름을 바꾸고, 멀리 떠나 보잘 것 없는 직업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이 세월이 흐른 어느날. 과거의 악몽에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 그 소녀가 그를 찾아온다. 이제는 27살이 된 여자가 50대 중반의 남자를! 이 남자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여자는 도전적으로 남자를 몰아세운다. 남자와 여자는 오가는 대사 속에서 15년 전에 있었던 일,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말과 행동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객마저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연극 ‘블랙버드’이다. 무대엔 단지 두 배우만이 출연하는, 영국 작가 데이비드 해로우의 연극은 2005년 처음 공연된 뒤 호평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는 2008년 추상미, 최정우 주연으로 무대에 한차례 오른 적이 있다. 그리고, 8년 만에 조재현 버전으로 다시 연극 팬을 찾는다.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DCF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는 연극 ‘블랙버드’의 전막 시연이 있었다. 남자 레이 역에는 조재현이, 여자 ‘우나’ 역에는 채수빈과 옥자연이 번갈아 무대에 올랐다. 한 순간의 실수-혹은 열정-으로 인생을 망친 남녀가 펼치는 폭발적 분노는 캐릭터의 날카로운 속내를 고스란히 무대에 쏟아놓는다.
90분간의 숨 막히는 전막 공연이 끝난 뒤 문삼화 연출가와 함께 세 배우의 간담회가 이어졌다.
문삼화 연출가는 “작가의 의도를 많이 생각했다. 대사가 굉장히 파편적으로 쓰여 있다. 단어의 무의미한 반복도 많다. 작가가 왜 그렇게 썼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며, “이 작가의 글은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없고 주어진 상황에서 인물들의 관계, 행동에 놓인 회색지대에 관심이 있다.”고 해석했다.
8년 만에 무대에 다시 올린 조재현은 난해한 작품을 신인 여배우와 함께 합을 맞추는 것에 대해 “어려움은 없었다. 이 연극의 매력은 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연극경험이 많은 배우보다는 신인배우가 상대역을 맡은 게 더 도움이 됐다. 그동안의 연기방식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12살 어린 소녀는 15년 동안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을까. 이 연극을 보면서 관객이 제일 먼저 품었을 생각이다. 옥자연은 “여관에서 사라져버린 레이에게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지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나가 15년 동안 레이만 생각하면서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상적이진 못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레이를 용서하러 간 거라 본다. ‘미안하다’란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레이의 생각은? 조재현은 캐릭터에 함몰했다. “우나를 향한 레이의 진심은 거짓말은 없다. 사랑했던 마음도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블랙버드’는 한 소심한 소아성애자의 성폭력을 담았다. 문삼화 연출가는 “기억은 반드시 왜곡된다. 그래서 레이는 정말 자신이 소아성애자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다. 그게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작가도 일부러 미스터리, 추측, 묘한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낸다.”며 정답이 없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조재현은 채수빈과 옥자연 중 누구의 작품을 권할까. “지인들이 그런 질문을 많이 한다. 학생들에게는 ‘옥자연’을 추천한다. 기회가 왔을 때 얼마나 멋있게 해내는지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친구들이 물을 때는 채수빈이다. TV에 나오는 유명한 배우를 볼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작품을 보고 나면 제목이 왜 ‘블랙버드’일까 궁금해진다. 작가는 왜 작품에 등장하지도 않는 ‘검은새’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궁금했다. 상징일까? 작품을 직접 번역한 연출가의 대답.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때 “바이바이 블랙버드”(Bye Bye Blackbird)라는 재즈 음악을 듣다가 그냥 마음에 들어 제목으로 삼았다고 하더라. 비틀즈의 ‘블랙버드’라는 노래도 있는데. 그리고 나중에 보니, 사람을 쪼면서 끝까지 고통을 주는 검은새에 대한 전설 같은 게 있다고 하더라. 작가는 그런 것을 몰랐을 때 그냥 제목을 붙인 거라고 하더라.“고 덧붙인다.
조재현은 ‘소아성애범’(이었던) 레이의 연기를 하는 것에 대해 “2인극은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고, 투수가 있으면 포수가 있어야하는 작품이 많다. 이번 작품에서는 우나가 던지고 내가 받는 역할이었다. 우나에 따라 내가 많이 변하는 작품이다”며, “그 인물의 15년 전의 일은 가슴 밑에 두고, 이후에 느닷없이,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지는 실시간 상황으로 보았다.”고 밝혔다.
연극 ‘블랙버드’는 대학로 DCF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바크홀에서 오는 11월 20일까지 공연한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