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본 사람은 정소민이 이동휘 선생의 실상을 알게 되는 것은 졸업식 날 교무실에 비치된 ‘모범교사 표창패’와 함께 있는 편지를 통해서이다. 이 장면은 어떻게 된 것일까.
“원래 극본공모전 당선자의 글에서는 태남(이동휘)이 떠나고 그 하숙집으로 새로 이사 온 사람이 태남의 짐을 내다 버리다가 편지를 발견한다는 것이었다. 작가도 이 부분에 대해 썩 내켜하지 않더라.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중요한 편지를 발견한다는 게 너무 우연적이고 무의미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디와 작가가 생각한 방식은 ‘박주영 교사’이다. “이채은 배우가 연기한 박 교사가 둘을 잇는 역할을 어느 정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 선생이 이걸 직접 해명하려 돌아다니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박 교사의 입장에서는 태남처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타부타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태남의 흔적이나 유품, 유산을 학교에 남겨놓고 싶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덧붙인다. “사실 태남의 모범교사상은 굉장히 아이러니한 것이다. 한발자국 떨어져 보면 조롱에 가까운 상(賞)이다. 친일파가 일제의 훈장을 받는 것처럼. 그런데 ‘진정한’ 모범교사의 훈장이 된 시점에서 박주영이 장식장 안에 그것을 기억해주고, 남겨준다는 것. 그 기억을 남겨준 사람도 미처 예상치 못하게 그 안에 남아있던 편지를 순덕에게까지 전달하는. 그런 식으로 각자의 작은 역할들이 모여서 선의가 전달되고, 그 선의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힘이 되는 그런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피디의 설명을 들으니, 눈물이 핑 돈다. “선의는 언젠가는 알게 된다는 것을!”
KBS는 ‘드라마스페셜 2016’ 시즌에 모두 10편의 작품을 준비했다. 홍보자료엔 ‘10명의 연출가, 10편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 한 피디가 두 작품을 연출했으니 ‘9명의 연출가’인 셈이다. “하하. 그 영상을 두고 이야기가 있긴 했다. 그런데 사실, 드라마스페셜팀의 지병현 팀장을 포함하면 10명이 맞다.” 물론, 이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에 혼란스런 데모 장면과 ‘86아시안게임-88올림픽 개최’를 전하는 흥분에 찬 KBS 기자 리포팅이 뒤섞여 나온다. 유 피디의 설명.
“KBS뉴스 자료화면을 뒤졌다. ‘내년에 아시안게임이 열린다’와 ‘내년에 88올림픽이 열린다’라는 멘트가 자연스럽게 들어간 장면이 필요했다. 넣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은 그 리포팅한 기자가 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기자, 아들은 피디
유자효 기자이다. 첫 번 째 맞선녀 다방에서 나오던 그 멘트도 유자효 기자의 멘트이다. KBS 공채 2기. (지금 KBS드라마센터장은 공채 17기이다) 유자효 기자는 이후 SBS로 옮겼다. KBS에는 자료화면의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KBS에 들어와서 언젠가 시대를 다루는 드라마가 생기면 한 번 저만의 기념을 해보고 싶었다. 마침 딱 필요한 리포트가 ‘내년에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하필 아버지의 멘트가 맞아 떨어졌다.” 그럼, 타자기 사용했다는 시인은? “아버지는 입사하기 전에 시인으로 먼저 등단하셨다.”
1972년에 시인으로 먼저 등단한 유자효 기자는 KBS를 거쳐 SBS를 정년퇴임한 후, 지금은 시인으로 더 열심히 활동 중이다. 17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꼭 직접 글을 쓰지 않더라도 작가에 대한 로망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점에서. 그런 점에서 이런 이야기가 소구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유 피디의 이야기이다.
군인 관사에서, 군인들의 불륜(혹은 로맨스)을 다룬 점에 대해 영화 ‘인간중독’을 언급하자, 유 피디는 문학적인 대답을 한다. “사실은 노골적으로 드라마 안에서도 밝혔지만 ‘안나 카레리나’의 인용이다.”며 작품 속 ‘장군부인의 위험한 사랑’을 소개한다.
“작품 속 야설은 내가 직접 다 썼다. 1권과 2권. 통으로 다 써서 배우들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 속에는 안나 카레리나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둘이 안나의 불륜을 두고 이야기를 하면서 논쟁을 벌이고 더 친해지고 그런 내용이 있다.” 갑자기 그 소설이 읽고 싶다.
드라마제작한 피디만이 알고있는 내용은 더 있다. 정소민이 다니는 학교는 경성여자고등학교이다. 서울이 아니다. “작가 고향이 경북 의성이다. 줄여서 경성. 작가님의 고향의 분위기가 드라마 전체의 톤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서 우리만 아는 기념을 해주고 싶었다. 작가는 아직 모른다.(인터뷰를 하고 바로 알려줬단다)”
‘원래 소품과 미술 때문에 시청자에게까지 전달되지 않더라도 이름을 여럿 지어야 하는 상황이 늘 있다. 그 때 나 혼자만이라도 그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주변인이나 기억하는 이름들을 넣곤 한다. 교장, 교감, 순덕 부모 이름 같은 것들이다. 순덕 부모 이름은 ’장하림‘과 ’윤여옥‘이다. 각각 타자기의 낡은 명찰과 집 앞 명패에 등장한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따왔다. 소녀1은 이름이 불리진 않지만 명찰 때문에 이름이 있어야 했다. ’고봉숙‘이라고 지어주었다. 한 때 잠시나마 불렸던 KBS의 애칭이니까.
다시 ‘빨간 책’. “기차역은 청주 근처의 오래된 역사였고, 기차는 CG로 그림 합성이었다. 눈치 챘나요?” 몰랐다고 대답하자. “아, 성공했네요.”
다시 보자. 기차를! (박재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