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어른이 될 것이라고는 배웠으나 현실은 소주 반주를 곁들이며 신세를 한탄하는 직장인이 되는 것처럼 삶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 속에서 인간들은 다양한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선택,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영화 '장르와 로맨스'는 상처와 발전을 통해 삶을 이어나가는 어른들의 이야기와, 그것을 이겨낸 그들을 향한 위로가 담겨 있다.
영화 '장르만 로맨스'(감독 조은지)는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한 유명 작가 김현(류승룡 분)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다양한 관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키워드가 '관계'인 만큼 작품 속에는 다양한 관계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충돌을 통해 인간사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처와 선택들을 나열한다.
최근 드라마 '인간실격'에 출연해 약사 순규 역으로 시청자들에게 먹먹한 울림을 준 그는 이전에도 다양한 전작들로 오랜 기간 배우로 인지도를 쌓아왔다. 더불어 단편영화 연출부터 시작한 그는 이번 겨울, '장르만 로맨스'로 관객들에게 용기 있게 다가섰다. 그와 만나 '장르와 로맨스'의 비하인드스토리, 통통 튀는 인물들과 관계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어른의 의미까지 되돌아봤다.
Q. 배우로서의 활동을 오래 해왔지만 그동안 단편영화 연출부터 시작해 감독이라는 꿈의 토대를 조금씩 쌓아왔고 첫 장편영화 데뷔를 했다. 소감이 궁금하다.
개봉 날짜 잡히고 나서 마음이 늘 똑같다. 떨리고, 설레고, 기대되고 두렵다, 여러 가지 감정이 계속 왔다갔다 하는데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많이 공감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영화를 만든 목적이 있다면 그것이다. 시기상 어렵고 조심스럽긴 하지만 극장이 조금 더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참여했던 스태프분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Q. 오랫동안 해온 배우활동 덕분에 감독의 롤을 더 잘 소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장르만 로맨스'에 참여했던 배우분들의 성향이 다 다르긴 하지만 작품에 임하는 자세는 다 같았다. 그 마음을 알기에 이해하려 굉장히 노력했지만 촬영 당시에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배우분들이 그런 부분을 많이 배려해주셨다. 디렉션 자체가 조심스러웠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좋은 말로 많이 해주셨다.
Q. '장르만 로맨스'에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기상천외한 서사를 만들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원래 각본이 있었고 그 각본을 받아서 각색했다. 굉장히 평범한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아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평범하지 않은 관계에서 오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시선이 될 것이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감정과 진심에 집중했다. 서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인물들의 성장 이야기이기에 그들의 감정선이 오해를 받거나 불편한 시선을 받게 하지 않기 위해 선을 짚는 것이 중요했다.
Q. 공감한다. 답변대로 '장르만 로맨스'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사랑과 폭력 사이의 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결국) 나오진 않지만 김현이 유진에게 선을 지키자는 말이 있었다. 관객들한테도 선을 지키고 싶었다. 그들의 사연이나 감정에 따라갈 수 있게끔 신경 썼다. 그런 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Q. 들을수록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장르만 로맨스'에는 동성애라는 민감한 주제가 나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희화화가 담겨 있는 작품을 싫어하는 편이라 이런 영화는 어떨까 걱정했는데 영화 후반부로 흘러가며 묵직하게 받아치는 메시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의 의도는 어떠했는가?
의도한 연출대로 관객분들이 받아줄까 고심했다. 웃음 포인트들은 유진의 감정이나 유진이라는 인물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서 필요했다. 평소에 알고 있는 그들의 모습,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모습이 아닌, 마지막으로 갈수록 유진의 감정이 깊어지면서 유진을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길 바랐다. 그런 의도가 관객분들에게 더 전달이 되길 바랐다. 웃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한 반전, 관객분들의 마음이 바뀌는 반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앞에서 웃었지만 뒤에서는 그를 더 이해할 수 있는, 그의 감정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깊이 있다는 감성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동성애를 무거운 소재로만 다루는 것도 마음이 아팠고 약자로 표현이 되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작업을 할 때 주변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분에게 모니터링을 받았다. 그들이 원하는 시선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부분에서 사전 인터뷰를 했었다.
Q. '장르만 로맨스'는 배우들의 케미스트리가 빛나는 작품이다. 연륜 있는 배우들의 조합이었고 이미 서로를 알고 지내는 동료들도 많았기에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을 것 같다. 그래서 좋은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배우들의 역량이 일단 뛰어났다.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도도 깊었다. 아이디어도 많이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부분을 많이 이야기했다. 나는 뉘앙스가 중요했다. 그런 지점에 대해서 요구는 드렸는데 바로 캐치를 해주셨다. 뉘앙스와 선을 지키기 위해서 소통이 잘 됐던 것 같다.
Q. 다들 대단했지만 극중 김현을 짝사랑하는 유진 역의 무진성 배우의 캐스팅이 인상 깊었다. 그는 어떤 과정을 통해 캐스팅하게 됐는가?
유진이라는 인물은 이미지적으로 구체적이였다. 거침이 없는 그 당당함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쌓아가는 세월 안에서 성향으로 묻어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지점에 있어서 무진성 배우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연기, 감정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거침이 없고 당당했고 해석도 남달랐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배우분들과 달라서 혼란스러웠는데 오디션을 마치고 돌아가는 진성씨를 다시 불러서 다른 장면의 대본을 주면서 연기해보라고 요청을 드렸다. 그때 '유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Q. 참고로 순모 역을 맡은 김희원 배우가 자신이 다른 역할을 맡아본다면 유진 역을 꼭 하고 싶다고 말했다.(웃음)
그 말을 무대 인사 때도 하셨다.(웃음) 그래서 류승룡 선배님이 "콜!" 하셨다.(웃음)
Q. 차기작에 두 배우를 붙여놓을 마음은 없는가?(웃음)
좋을 것 같지만 내가 자신이 없다.(웃음) 그냥 두 분의 케미스트리가 너무 좋은 것 같다. 두 분의 케미스트리가 너무 좋았다. 장난도 많이 치시고, 화기애애하다. 두 분의 티키타카가 오나라 선배님까지 합세해서 이번에도 '장르만 로맨스'라는 좋은 작품이 나온 것 같다.
Q. 주연 배우들을 비롯해 배우 오정세, 류현경 등 잠깐 등장하는 조연들 또한 어마어마한 연기파 배우들이 등장한다. 캐스팅 과정은 어땠는가?
나를 많이 응원하는 분들인데 출연을 제안했을 때 선뜻 두분 다 "어. 해야지"라고 해주셨다.
Q. 류현경 배우의 경우 오나라 배우와 처음 만나 촬영한 신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신이었다고.(웃음)
(웃음) 다 죄송했지만 류현경 배우한테 많이 미안했다. 처음 만나서 촬영하는 날 그렇게 됐다. 류현경 배우도 친화력이 좋고 오나라 선배님도 친화력이 갑이셔서 두 분의 합이 좋았다.
Q. 작품을 보며 제일 공감 갔던 대사는 김현 길거리에 앉아 말하는 "50대는 지천명이라는데 내 인생 존나 허접해"였다. 10대가 보는 20대가 다르고 20대가 보는 30대가 다르듯,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의 정의는 매순간 달라지지 않나. 감독 본인이 생각하는 어른의 정의는 무엇인가?
말해주신 그대로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의 전사는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다. 김현이 어떻게 바람을 피웠는지, 어떻게 미애한테 상처를 줬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이 그때그때의 선택에 의해서 책임감이 막중해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지금 나도 중년이 되어가고 이미 중년이 되어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있다. 이들이 성장이 멈췄다면 시련 자체도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련이 성장할 계기로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정의는 늘 배워가는 사람이다. 어떤 지위에 올라 누군가가 내 말에 귀기울여주고, 내 말에 호응해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정답을 내릴 때가 있다. 그러면 더이상의 발전과 성장은 없다. 중년의 위치에 있으면 책임감이 막중해진다. 그럴수록 더 배우고 자신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연말은 관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시기다. '관계'가 키워드인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해졌으면 좋을 것 같은가?
우리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하지만 그 끝에는 항상 성장하는 모습이 있다. 상처를 주고 받더라도 우리가 한 번 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기대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좌절 속에 트라우마 속에 갇혀서 정답을 내리기 보다는 좀더 내가 내 자신에게 작용이 됐는지를 집중해주셔서 봐주셨으면 한다. 나 스스로 발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요즘은 서로 굉장히 조심하는 세상다. 그러기에 더욱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사람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러기에 더욱 그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을 때도 한다. 그 관계들이 끝이 아닌데 상처를 받고 움츠려들기보다는 좀 더 나아가서 더 다양한 관계에서 성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