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일) 밤 9시 40분에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2세기, 파죽지세로 여진을 격파하고 동북 9성을 개척한 고려 명장 윤관을 다룬다.
1104년, 고려 국경을 침입한 여진의 군대에 뼈아픈 패배를 당한 윤관. 그는 결국 자세를 낮추어 여진과 강화를 맺고 돌아온다. 이후 윤관은 패배의 원인을 깨닫고 당시 고려 국왕 숙종에게 강력한 기동력을 가진 여진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별무반(別武班)’ 창설을 건의한 것이다.
윤관은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 부대인 ‘신보군’ 외에 다양한 특수 부대를 편성하고, 현직 문ㆍ무 관리를 제외한 말을 가진 모든 남성과 과거 준비를 하지 않는 20세 이상의 남성을 모두 동원한다. 여진을 깨부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 윤관. 3년 후 1107년,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여진 정벌에 나선다. 윤관의 고려군은 차례대로 여진의 성을 함락시키고, 고려는 새롭게 확보한 여진의 영토에 아홉 개의 성, 즉 ‘동북 9성’을 축조한다. 3년간 준비한 여진 정벌이 빛을 본 순간이었다.
1109년, 고려 조정에서는 동북 9성 반환에 대한 논의가 열린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여진족이 필사적으로 고려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계속된 여진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동북 9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 고려. 결국 여진에게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맹세와 ‘기와 조각 하나도 고려에 던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동북 9성의 반환을 결정한다.

“윤관이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패전하고
나라에 피해를 입혔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 고려사 열전 윤관
이후 윤관은 동북 9성 반환 논의와 함께 탄핵 당한다. 고려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의 역사가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계기로, 후에 점점 더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건국하는 여진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세종의 6진 개척 역시 동북 9성이란 고려의 역사를 토대로 시행될 수 있었다.
지금의 한반도 영토를 확립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고려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6월 5일 일요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 편에서 이야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