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직격>이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꺼내본다.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사실 증언은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기 전,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을 입증하기 위해 나선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일본군‘위안부’ 운동의 1세대 활동가인 윤정옥 교수다. 윤정옥 교수는 자신이 운이 좋아서 일본군‘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 그때 끌려갔던 소녀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했던 윤정옥 교수는, 이후 평생을 한국과 국제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8년 윤정옥, 김혜원, 김신실. 세 사람은 강제동원 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찾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막상 그들이 찾은 피해자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이들에게 만나주지 않았다. 피해 당사자의 증언이 꼭 필요했던 상황에서 드디어 최초의 증언자가 나타났다. 김학순 할머니였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해 낱낱이 증언을 하였고, 뒤이어 숨어있던 다른 피해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사 직격>은 윤정옥 교수를 비롯한 1세대 활동가들을 통해 ‘위안부’운동의 탄생과 분투기를 들었다.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가해국과 가해자의 인정과 반성을 이끌어 내고자 했던 활동가들.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 4개월 후 1991년 도쿄의 한 강연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정원이 200명이었음에도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가해국, 그리고 가해국민 앞에서 일제의 모든 만행을 고발한 김학순. 당시 현장에 있던 양징자 대표는 김학순의 증언에 사람들은 충격과 죄책감을 느끼는 분위기였다고 말하는데.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영상을 <시사 직격>에서 최초로 공개한다.
김학순 할머니가 가해국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가해 국민에게서 열띤 반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배봉기 할머니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오키나와에서 체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위안부’ 피해 사실을 말해야만 했던 배봉기 할머니. <시사 직격>은 배봉기 할머니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김현옥 씨와 배봉기 할머니를 취재했던 작가 가와다 후미코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00년 12월, 도쿄 구단회관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에 대해 열린 국제법정이 열렸다. 남한과 북한, 일본 그리고 국제 사회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강간과 성노예제에 대한 책임으로 유죄를 선고하였는데. 민간법정이었기에 이 판결은 법적 강제력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국제연대를 통해 시민의 힘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법정에 올리고, 전시 하에서 발생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단죄할 필요성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2000년 국제법정. 하지만 그로부터 21년이 흐른 지금, 일본군‘위안부’ 운동은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고,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사회적인 시선은 달라졌다.
일본군 ‘위안부’로 인한 한일의 외교경색이 심화되고 윤미향 사태로 인해 ‘위안부 문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 위안부 운동의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모색해야 하는가. ‘공개증언 30주년 - 김학순, 우리 앞에 서다’ 편은 KBS1TV 금요일 10시 <시사 직격>에서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