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만과 편견'과 '어톤먼트' 같은 명작은 다시 나오지 않는가. 그리고 그 명작을 만들었던 조 라이트 감독은 왜 '시라노'로 돌아왔는가. 원작을 너무 믿었던 탓인가. 아니면 뮤지컬 '영화'라는 형태를 잘못 이해한 조 라이트 감독의 역량 부족인가.
영화 '시라노'(감독 조 라이트)는 누구와도 붙어 이길 수 있는 무술 실력을 지녔지만 사랑 앞에서는 용기가 없어지는 시라노(피터 딘클리지 분)와 그가 짝사랑하는 록산느(헤일리 베넷 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록산느에게 거절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오랫동안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시라노는 결국 록산느가 다른 남자인 크리스티앙(켈빈 해리스 주니어 분)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되고 낭만적인 성격이 아닌 크리스티앙을 위해 자신이 대신 편지를 써주고 말을 전달하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자신을 희생하게 된다.
애절한 시라노의 짝사랑, 그리고 비극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던 원작이기에 관객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작을 뮤지컬 영화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조 라이트 감독은 '영화'를 통해 서사를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은 듯 보인다.
마치 실제 뮤지컬처럼 무대 장치를 보는 듯한 연출은 의문을 자아낸다. 좁은 무대에 비해 더욱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의 특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 연출은 큰 스크린 속에서도 등장인물이 갇혀있는 듯한 답답한 시퀀스와 앵글만이 가득하다. 오히려 그들의 서사를 무대보다 좁은 세계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보여지게 만든다.
무대장치를 이동하듯 삐걱거리며 이어지는 컷들의 흐름은 더욱 가관이다. 만약 관객이 중간에 졸다 깨었다면 잠든 사이 인터미션을 가진 줄 알았을 것이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전장으로 나가게 되며 갑작스레 설산이 등장하는 신은 마치 조각보를 이어붙인 듯한 어색한 전환이다.
더불어 작품 전반에 이어지는 고구마 전개는 원작의 서사를 가져온 것은 이해하나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해 공감대를 불러오기 어렵다. 배경이 과거임에도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에게 주목했던 전작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와 달리 '시라노'의 록산느는 능동적이라기보다는 막무가내 중2병 소녀 같은 행동과 대사로 침식된 느낌이다. 차라리 조금 더 각색을 붙여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대중성을 더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영화로서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뮤지컬' 영화로서의 특장점을 잘 살렸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애매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넘버들에 비해 배우들의 어색한 노래 실력은 둘째 치고 크리스티앙 역의 켈빈 해리스 주니어는 전작 '나의 첫 번째 슈퍼스타'에서 보여준 알앤비 창법을 꺼내버린다. 현대도 아닌 중세 배경의 영화에 갑분 알앤비가 등장하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이 광경은 '야인시대'에 김두한이 아닌 김조한이 나온 느낌과도 같다.
게다가 턱없이 부족한 댄서들의 안무 실력은 탄식을 유발한다. 군무는커녕 팔의 높낮이, 안무 대형, 소품을 드는 각도까지 안무가 당최 하나도 맞지 않아 시선을 중구난방으로 분산시킨다. 이것이 연출자의 의도된 연출이었다면 더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스텝 업' 시리즈를 연출한 존 추 감독의 '인 더 하이츠' 같이 뮤지컬 영화로서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댄스적인 아름다움과 쾌감이 있었을 텐데도 그를 깡그리 증발시킨 이 작품이 K-POP의 나라에 사는, 방탄소년단의 칼각 군무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 앞선다.
그나마 박수를 보내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주연 배우 피터 딘클리지, 그리고 헤일리 베넷의 황홀한 로맨스 연기는 두 등장인물 사이에서 엮여진 길고도 험했던 운명의 결과를 보여주며 그들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스크린을 넘어 애틋하게 전한다. 2월 2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