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윤고은은 사회에 비치는 프리즘의 모든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다. 더불어 사회적인 문제를 기발한 상상력과 뒤섞어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중한 시선으로 독자들을 그의 세계에 초대한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의 ‘대거상 번역 추리소설상’을 거머쥔 윤고은 작가는 허를 찌르는 상상력만큼이나 부지런한 작가다. 그는 지난 5월 신간 ‘빈틈의 온기’를 낸 것에 이어 결혼보험약관이라는 발칙한 상상이 담긴 새로운 작품 ‘도서관 런웨이’로 독자들을 부지런히 찾아왔다. 결혼이라는 말 자체가 현실과 이상, 그 어떤 단어에도 속하지 않는 시대에 살게 된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까. 윤고은 작가와 함께 이번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Q. 평소 성격이 다른 두 요소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세탁소 위에 있는 떡볶이집) ‘도서관 런웨이’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결의 제목이다. 도서관과 런웨이는 사뭇 다른 무드를 가진 장소인데, 기본 이야기 틀도 있겠지만 혹시 제목을 이렇게 정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책은 잘 묶인 한 권의 인생이다. 도서관에서 우리는, 펼치면 한 장 한 장 이야기가 가득한 그 수다쟁이 책들이 가장 컴팩트한 사이트로 몸을 접은 채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걸 볼 수 있다. 도서관은 고요한 공간이지만, 바로 그 수다쟁이 책들 때문에 훨씬 압도적인 고요함을 가진다. 내 키보다 훨씬 큰 책벽을 따라 찬찬히 걸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여기엔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화려한 조명이나 음악도 없지만 이곳이 아주 은밀한 무대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책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 수많은 이야기, 수많은 인생 중의 하나를 나를 골라 집어 들고 읽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책 속의 이야기들을 옷처럼 입게 되는 것이다.
책 초반에 ‘안나’가 도서관 런웨이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책 후반에 가면 또 나오는데 후반에 나오는 안나의 도서관 런웨이는 책 초반에 나온 것과 느낌이 좀 다르다. 보폭이 훨씬 좁고, 속도도 느리고, 이제 더 SNS에 올리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끝 무렵, 안나가 옮겨놓는 것은 본인의 걸음만이 아니기 때문에 규모가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두 부분 모두 안나가 걷는 동안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바라볼까, 그것에 집중하면서 썼다.
Q. 윤고은 작가의 작품들에는 유머와 서스펜스가 동시에 깃들어져 있다. 이번 작품도 현대사회의 문제 중의 하나인 결혼 문제를 다뤘는데 젊은 세대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마주한 문제기도 하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갈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면 덜 무섭지 않나. 손을 잡았으므로 완전히 밤이 낮으로 바뀐다거나, 손을 잡았으므로 없던 가로등이 수백 개 생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서로의 온도를 느끼고 함께 보폭을 맞추면서 걸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악보 위에 존재하기로 약속한 음표들처럼. 누구도 미래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수줍게 혹은 절실하게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고 또 거기에 다른 한 사람을 초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초대 방식 중 하나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와 함께라면 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아, 조금 덜 외로울 것 같아, 그리고 ‘나’ 도 ‘너’에게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어, 하고 고백하는 한 양식이 결혼이다. 그 말은 곧 다른 갈래의 양식들도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이제 결혼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다. 어른이 되면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모두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식의 흐름은 이제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어른이 되면 누구나 가능했던, 혹은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일 중에 어려워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젊은 세대에게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물을 게 아니라 결혼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묻고 들여다봐야 한다.
이번 소설에는 결혼을 택배 상자에 비유하는 부분이 나온다, 정말 과거의 결혼이 택배상자 5호 크기였다면 이제는 2호나 3호 상자로도 버거운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결혼이라는, 두 개인의 선택 위에 어마어마한 책임을 담으려고 한다. 그러면 누가 낭만을 챙길까? 낭만 얘기를 하면 어른이 아닌 걸까? 나는 결혼이 불확실한 미래를 서로의 삶 위에 겹쳐둔 두 사람의 삶에서 낭만을 챙겨주는 제도였으면 좋겠다.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을 하다가 결혼이라는 모험을 조금 더 돕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보험회사를 차리고 싶었다. 소설 속에 등장한 안심결혼보험을 파는 곳인데, 물론 여기도 오래 못 가고 망한다. 당연히 독자들도 보험회사가 우리의 낭만을 해결해주지 못하리라는 걸 알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 속 어느 인물에게는 보험이 뜻하지 않게 앨범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을 것이다. 보험사에서는 그런 용도로 목소리 녹음이 가능하게 만든 건 아니기 때문에, 예측 못한 활용일 텐데 나는 그런 부스러기의 힘을 좋아해서 소설에 담는다.
Q. 평소 그런 부스러기와 같은 디테일이 독자들의 관심을 더욱 작가님의 작품에 끌어들이는 것 같다. 이번 작품 속에서도 안심결혼보험 약관집이 등장하는데 세세한 사항들까지 기록되어있다. 이런 디테일을 어떻게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다.
이 소설에는 두 세계의 약속이 등장한다. 하나는 안심결혼보험 약관집의 문장들이고 다른 하나는 연인이 주고받는 말들이다. 보상을 받기 위해서 보험약관을 세세하게 따져보는 것이야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풍경이지만, 이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보험약관보다도 연인이 남긴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고 되새기고, 그 말에 담기지 않은 부분까지 닿고 싶어 애쓰는 인물이 보인다. 연인과 주고받은 약속의 말들이 홀로 남겨진 사람에게 어떤 힘이 될까, 그 생각을 많이 했다. 그때 그 말을 한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닿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에 대해 상상했다.
안심결혼보험 약관집은 ‘도서관 런웨이’라는 이번 소설 안에 들어간 ‘책 속의 책’ 이다. 이 약관집을 만들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점은 주계약과 특약을 구분하는 것이었따. 그러니까 보험에서 주계약과 특약이 존재하는데, ‘배우자의 가족이나 명절이나 외도와 같은 부분들은 최대한 특약에 넣는다’는 것이었다. 소설에도 밝혔지만 주계약은 보험의 뼈대로서 해지가 불가능한 거고, 특약은 언제든 해지가 가능한 개념이여서다. 이를테면 배우자의 가족이라는 게 우리 결혼 생활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할 수 있지만, 이 보험회사에서는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을 위한’ 방법으로 배우자의 가족은 언제든 해지 가능한 개념으로 본다. 보험사 언더라이터로 일하시는 분을 만나 취재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만든 보험은 세상에 없는 보험이긴 하지만.
Q. 작품 속에는 팬데믹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는 문구들도 있다. 키스를 표현할 때 마스크를 언급하는 부분 같은 것들이 돋보였다.
코로나 이후 내가 쓴 모든 소설에 다 코로나가 직접적으로 등장했던 것은 아닌데 이 소설에서는 코로나가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쓸 수가 없었다. 소설을 처음 구상했을 때는 코로나가 우리 삶을 뒤흔들기 전이었다. 쓰는 중에 코로나를 맞닥뜨리게 되었고,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저와 같은 세계를 살게 된 것이다. 모임 인원 제한이 지자체마다, 또 시기마다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그런 부분까지 모두 고려해서 쓰게 되었다.
소설 속에는 코로나로 결혼식을 미루고, 회사를 그만두고, 가게 폐업신고를 하고 대리운전을 시작하거나, 신혼부부특공을 위해 혼인신고를 미루는 모습들이 등장한다. 소설에 ‘캐리어 파먹기- 캐파’ 라는 말을 썼는데요. ‘냉장고 파먹기-냉파’처럼 과거에 여행한 기억들을 추억하는 힘으로 견디는 것이다. 여행도 코로나 이후 생긴 변화 중 하나다. 그런데 가장 큰 건 ‘기후공감 특약’에서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 안심결혼보험에 ‘기후공감 특약’이 생길 때는 지구가 회복된다는 증거를 확보할 일은 거의 없을 거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회복된 건 아니지만 코로나로 반짝, 2020년의 지표 몇이 도드라졌다. 그런 걸로 기후공감 특약 보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Q. 진짜 안심결혼보험 약관이 현대사회에 존재한다면 인기가 높을 것 같은지, 혹은 사회적인 논란이 될 것 같은지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일단 이 보험은 가입해서 20년 만기가 될 때까지 한 번도, 단 1회도 결혼하지 않는 경우에 원금의 130%를 환급해준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물론 30%를 더 받겠다고 결혼을 안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도 세세한 일상생활에서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보장금액이 아니다. 이 보험 청구 과정을 통해서 가정 내의 권력 구조랄까 그런 게 재편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 속 예단예물 편에서는 예단예물을 어떻게 썼는가 그 내역을 영수증 등으로 증명하는 상황이 오는데 원치 않으면 안 하면 되지만, 영수증으로 이미 소비한 삼백만 원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증명하면 보험사에서 페이백을 해준다. 그러니 아무래도 소비자는 응하게 된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을 때 그 사람의 소비내역을 보는 건 아주 큰 정보가 되지 않나.
보험사는 보험 가입자 입장에서 그들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할 말을 하게 해준다. 지속가능한 결혼생활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환금성이 아주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보험회사의 약관집은 한 가정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 매뉴얼이 되어준다. 물론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나 역시 결혼할 때 몇몇 온라인 카페에서 ‘요즘 보통’ 으로 시작되는 검색어를 집어넣으면서 무언가를 찾아봤기 때문이다. 선택은 내 몫이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라가는 흐름이랄까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매뉴얼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보험이 실제로 나온다면 난 가입하지 않을 것이다.
Q. 이 시대의 결혼을 앞둔 청년들뿐만 아니라 결혼에 대해 선택지를 두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공감 가능한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님은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앞서 말했듯, 어떤 것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어떤 것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결국 내가 하는 것인데, 우리는 여전히 불안한 존재다. 그건 꼭 결혼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우리 미래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미래는 지금이 몇 시든지 간에 언제나 밤이다. 어둡고, 불빛이 없는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 혼자 걸어갈 수도 있고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어갈 수도 있고, 손을 잡지 않아도 곁에 누군가가 걸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 위안을 줄 수도 있다. 어두운 밤을 걸어가는 방법은 아주 많다. 그 중에 하나가 결혼이고, 결혼의 주축은 당사자 두 사람이다. 결혼보험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소설 안에서 ‘현재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현재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 그것을 소설 안에서 읽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슬픔에서 일어나는 방식을, 그리고 한 발씩 내딛고 걸어가는 길을 지켜봐 주시면 좋겠다.
Q. 만약 차기작에 대한 구상이 있다면 이러한 주제들이 담겼는지, 어떤 틀의 이야기가 될 것인지 귀띔해줄 수 있는가?
곧 장편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엔 주요 배경이 미국 서부다. 무언가를 찾으러 거기까지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텐데 그들이 찾는 게 뭘까? 그건 소설에서 확인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