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지은이) / 이동교(옮긴이) / 문학동네 / 504p
"쉿, 건물이 불타고 있어."
불타는 건물 안에서 숨죽이는 목소리로 "살려주세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당장 눈앞에 화염이 휩싸이고 있는데 건물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속삭이는 풍경, 그것이야말로 회사 내 성차별, 성폭력에서 생존하려 발버둥치는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묘사하는 현실 그대로의 비유일 것이다.
'위스퍼 네트워크'는 최고 경영자로 곧 승진할 회사의 남성 임원, 에임스를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업을 잇는 유력한 차기 CEO였기에 다수의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혹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침묵하고 있었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결정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비로소 소송을 걸고 회사를 고발하지만 그러던 중 에임스가 추락사하게 되고 법무팀을 상대로 보복을 당하며 갖은 고난을 겪게 된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로 요주의 남자 명단을 공유하는 여성들 간의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위스퍼 네트워크'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회사 내 불합리함과 모든 종류의 폭력을 세심하게 묘사한 전개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심리적인 서사가 담겨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이나 다름없는 일터로 걸어나가는 직장 여성들을 향한 찬사, 혹은 위로가 담겨 있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지은이) / 김선희(옮긴이) / 열림원 / 176p
"이 사랑의 몸짓을 잃고서도 어머니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아니 에르노가 실제로 치매가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느낀 죄책감과 공포, 좌절감을 기록한 문병일기다. 나날이 야위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자신을 비춰보며 자신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아니 에르노의 모습은 지극히 우리 모두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 작품을 기획하고 담은 '열림원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시리즈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가 담긴 시리즈물로 프랑스에서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인정 받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프랑스 작가이자 문학 교수인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간 소설들로 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탄생될 정도로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 받는 문학인이다. 데뷔 시절부터 역사적 경험과 개인적 체험을 혼합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으며 결혼, 성과 사랑, 낙태, 어머니의 치매와 죽음 등 자신을 해부하는 소설을 써나갔다. 그중 어머니의 치매가 담긴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형식이 바탕이며 그의 작품 세계는 독자들을 초대해 국경을 넘어선 연대와 위로를 선사한다.